|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 ||||||
| 2 | 3 | 4 | 5 | 6 | 7 | 8 |
| 9 | 10 | 11 | 12 | 13 | 14 | 15 |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 30 |
- 경주김씨
- 티스토리챌린지
- 법주사
- 사인암
- 오블완
- 단지주혈
- 국립청주박물관
- 각연사
- 충북나그네
- 효자문
- 선돌
- 충주박물관
- 문경새재
- 보성오씨
- 청주박물관
- 효자각
- 곡산연씨
- 청풍문화재단지
- 충북의 문화재
- 부도
- 외사리 당간지주
- 화양구곡
- 밀양박씨
- 부여박물관
- 상당산성
- 공주박물관
- 문의문화재단지
- 공산성 선정비
- 한독의약박물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3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북이면 영하리에 있는 초계인 영득(榮得)의 아내인 안동김씨 옥련(玉㰈)의 기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절효부안동김씨기적비( 節孝婦安東金氏紀蹟碑)라고 적혀 있으며 후면에는 안동김씨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건립년도는 1978년 (단기 4311년)입니다. 안동 김씨 김옥련(金玉蓮)은 청원군 북이면 영하리 초계변문(草溪卞門)으로 시집온 조선조 효부이다. 김씨는 괴산군(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김영수(金榮壽)의 딸로 태어났다. 18세에 변붕래(卞朋來)의 아들 변영득(卞榮得)에게 시집와 시부모를 공경으로 봉양하고 매사를 조리있게 처리하였다. 시집온 지 4년 만에 남편이 병에 걸려 위중하였다. 김씨는 손가락을 베어 수혈하여(斷指柱血) 죽어가는 목숨을 4일간 회생시켰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
북이면 영하리에 자리하고 있는 초계인 변인규의 공적비입니다.변인규는 신묘년(1771)에 태어나 을미년(1835)에 졸 하였습니다.향년 65세 입니다.일찌기 조실부모하였으나 천성이 선하고 형제간에 우의로 타인의 귀감이 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송촌변공인규공적비(松村卞公仁圭功蹟碑)라고 각자 되었으며 좌우 후면에는 변인규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변인규는 초계변씨 우산공파의 손으로서 마을일과 함께 종중의 일에 관여 하면서 천안 직산면의 종중산 50여 정보가 타인에게 점거된것을 확인하고 1827-1830년 까지 3년여 동안 노력하여 대종회 소유로 돌려 놓았습니다.또한 세금미납등으로 국유화 되었던 북이면 초정리 임야 50정보를 종중의 사람들과 협의하여 불철주야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우산파 종..
북이면 영하리 진천송씨묘역의 무덤입니다. 맨 윗쪽에는 송광도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광도 (匡度) 8세(世) 낭장공파 파조(郎將公派 派祖)로서 문하평리공(門下評理公 소(玿)의 이남으로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일찌기 문무(文武)를 깊게 닦아 무관(武官)으로 나아가서 비순위정용낭장(備巡衛精勇郎將)에 이르렀다. 공(公)께서는 사람의 도리(道理)를 충(忠)과 효(孝)에 근원(根源)한다고 하시었으며, 부모(父母)에 대(對)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의 효행(孝行)이 국내(國內)는 물론 중국(中國)의 천자(天子)에까지 알려져 크게 감탄(感嘆)한 나머지 후세(後世)의 구감(龜鑑)이 되도록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命)하기도 하였다. 충북(忠北) 음성군(陰城郡) 맹동면(..
북이면 영하리에 위치한 송광도 효자문입니다.아직도 인터넷에는 맹동면 두성리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충북 혁신도시가 개발이 되면서 이곳 북이면 영하리 산44-1번지로 이건 하였습니다. 효자문을 옮기면서 당시의 안내판까지 모두 옮겨 세워 놓았습니다. 송광도는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이자 효자입니다. 본관은 진천(鎭川).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소(宋玿)이다. 송광도(宋匡度)는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본래 진천군 산정촌의 묘 아래 있었으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도와 학행으로 널..
진천인 송광도의 효자문을 찾을수가 없어 여기저기를 알아 보던 중에 우연히 진천면지에 실려있는 근래의 송광도의 효자문의 사진을 볼수가 있었다. 음성 두성리에 있던 효자문이 충북혁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북이면 영하리로 옮겼다는 글을 볼수가 있었다. 북이면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영하리 이장님들께 수소문 하여 지번주소를 얻을수 있었습니다.찾고나면 쉬운 것을 그 언저리를 몇 번을 돌았던 기억이 난다.네비에 지번을 찍고 영하리를 돌아다니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먼 곳에서도 훤하게 보이는 묘역이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좁은 농로를 따라 진입하니 멀리 효자문도 보이고 효자문 옆 산록으로 진천송씨 묘역이 보인다.송광도의 묘지는 산록 맨 위에 자리하고 있다. 호석을 둘렀으며 장명등,문인석,사자상,망주석등 모든 석물들은 모두 산..
내수읍 우산리 마을회관앞에 있는 절효부 기적비입니다.절효부 초계변씨와 효부박봉임의 기적비입니다.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초계변씨(1877~1939)는 평강인 전재우에게 시집와 부도를 지키며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다.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서 받들었다.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를 보존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달여서 올렸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의로서 삼년상을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5년간을 머리를 빗기며 의복과 이불을 빨아 입히고 덮어 주었다. 상을 당하자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불행이 겹쳐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옆에서 수발을 들었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게 기도하고 아침이면 초정약수를 길어다 미음을 끓여 간호하였다. 남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