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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율리에 위치한 율리저수지는 집에서 차로 이동하면 외곽도로를 이용하면 약 25분 정도 걸립니다.요즈음은 지자체마다 둘레길을 잘 조성하여 놓았기 때문에 가끔씩 아내와 둘레길 산책을 합니다. 오늘은 율리에 자리하고 있는 율리저수지를 찾았습니다.언제나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는 율리석불을 봅니다. 많은 세월을 지내는 동안 제대로 된 모습 민초들의 바램에 내어주고 지금은 많이 훼손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입상으로서 본래는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있었는데 1979년 7월에 삼기저수지가 완공되어 수몰되게 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불상의 높이는 2.1m이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썼으며 얼굴과 몸체는 양감이 풍부하고, 힘이 넘쳐 보이는 당당한 모습이다...
아내와 상당산성을 한 바퀴 둘러 보면서 다시 찾은 비석입니다.신태희는 평산인으로 조선 철종 대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병마우후를 지낸 무관이다.신태희(申泰羲)의 선정을 기려 함풍9년 인 1859년(철종 10)에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현재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9번지에 있습니다. 커다란 암반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앞면에는 병마우후신공태희영세불망비( 兵馬虞侯申公泰羲永世不忘碑 )라고 적혀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비석의 건립시기가 적혀있습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함풍9년(咸豊9년)으로 각자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지만 이 비석에 눈길주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지자체에서 여유가 된다면 작은 입간판 이라도 세워 놓았으면 하는 마음을 떨꾸고 왔습니다.
길을 걷다 땅에 떨어져 있는 모과를 본다.이것도 인연이려니 하며 집으로 가져와 식탁위에 놓았다.사람 눈길 없는 작은 감 하나도 친구삼아 놓고모과 향기를 맡아보려고나는 식탁 앞을 오고가며 코를 벌름거린다.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내는 웃음을 짓는다. 우리 집에 웃음을 주는 모과다.
군북면 대정리에 위치한 문화류씨 충경공파 재실입니다.대정리는 문화류씨 충경공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영사재(永思齋)라는 재실이 있습니다. 1506년 참봉 류은이 처음 이 곳으로 들어와 살았습니다. 근간에 새로 재실을 개축한 듯 합니다.울타리는 막돌담장으로 기와를 얹었으며 깨끗하게 후손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습니다.여재문(如在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삼문이 있습니다. 울타리 옆에는 덕산 류지성(德山 柳志晟)의 송덕비가 있습니다.방아실 마를의 숙원사업 이었던 재실앞에 넒은 공터인 화합의 광장을 조성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힘쓴 류지성의 마을향한 덕을 잊지않기 위하여 주민 일동의 이름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군북면 대정리에 위치한 열부 남양홍씨의 비석입니다.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비석에는 열부남양홍씨지비( 烈婦南陽洪氏之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부인의 열행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열부홍씨 부인은 남양인 여대의 따님으로 단기4214년 8월6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에게 순종하고 형제간 우애로 칭송이 높았다. 16세에 대정리에 사는 조선초 정승을 지낸 충경공의 후손이며 옥천군수 수장의 6대손 희철의 8대손인 인문의 부인이 되었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부군에 공경하더니 20세에 1녀를 낳고 부군이 병들자 백약으로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하직하고 말았다. 부인은 즉시 순절하려 하였으나 후사를 생각하여 부군의 장례를 치루고 조카 내열을 양자로 맞아 후사를 정하였다. 조상들의 도..
대촌大村과 와정瓦亭에서 한 자씩 따서 대정리라 하였다. 대촌리와 와정리가 있고, 자연마을은 대촌, 방아실, 세거리, 와정, 자가터, 거먹골이 있다. 예부터 마을이 커서 대촌大村이라 불렸다. 문화류씨 충경공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재실이 있다. 1506년 참봉 류은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 임진왜란 때 류흥수가 조헌 의병에 참전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여 종용사에 배향되었다. 그때 그의 손자 류복은 궁내사복으로 왕을 호종했다.행정리는 대촌리이며, 자연마을은 대촌, 방아실 등이 있다. 석회석이 포함된 토질이다.주작목은 벼농사이고, 특산물로는 육질 좋은 마늘과 하우스 포도이다. - 방아실: 대촌리 동편 대청호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지형이 디딜방아를 닮아 유래했다.- 방화정: 대촌에서 방아실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정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