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하리 김환극효비각(曾坪邑 南下里 金煥極孝碑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6. 17. 06:09

김환극효비각이 있는 곳은  ‘솔모루’ 또는 ‘송우(松隅)’로도 불리는데, 이는 ‘염실’과 청안현을 오고 가는 길목에 소나무가 많은 산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송우’는 ‘소나무 송(松)’자와 ‘모퉁이 우(隅)’자를 쓴 것이니, ‘솔모루’에 대한 한자 이름이다. 조선 세종 때 시인으로 청주목과 청안현을 두루 다니며 많은 시를 남긴 진의귀(陳義貴: ?∼1424)의 시문(詩文) 중에 ‘송우(松隅)’가 있다. 솔무루를 찾은 날은 마을 중심을 흐르는 개천가를 정비하고 있어 좁은 도로를 파헤쳐놓아 통행이 조금 불편했다.

 

진의귀(陳義貴: ?∼1424)는

1388년(창왕 1) 8월에 전 판사(判事)로서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영접사가 되어 사신을 접반하였고, 공양왕이 즉위하려고 남경(南京)에서 송도로 돌아올 때 길일을 가려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정습인(鄭習仁)과 함께 옳지 않음을 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1391년 정월에 윤구택(尹龜澤)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로 제수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여 귀양갔다가 10월에 돌아왔다. 1401년(태종 1)에 좌사간으로서 대사헌 이지(李至)를 탄핵하였다가 광주(廣州)에 안치되었다.곧 풀려나 다음해 형조전서로서 만산군(漫散軍) 임팔랄실리(林八刺失里)를 압송하여 요동에서 명나라의 만산군 추쇄사(推刷使)에게 넘겨주고 돌아왔다. 1409년 8월에 이조참의가 되고 세종 때에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죽었다.

 

남하 1리 마을회관 앞에 주차를 하고 건너편을 보면 자리하고 있는 것이 김환극 효비각이다.

효비각 안에는 안동김공휘환극유인광산김씨지효비( 安東金公諱煥極孺人光山金氏之孝碑)라고 적힌 비석이 1기 자리하고 있다.

조금은 장난기 있는 거북대좌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환극부부효비각(金煥極夫婦孝碑閣) 은  남하 1리 ‘솔모루’에 있는 효비각이다. 효비각은 1972년에 김환극(安東金氏)과 그의 처 광산김씨(光山金氏)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김환극은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14대손으로 증평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을을 항상 기쁘게 해 드렸다.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환 증세를 파악하여 백방으로 다니며 약을 구했다. 추운 겨울날에 물고기 먹고 싶다고 하므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를 드린 결과 얼음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는 등 효성을 다했다. 그러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애통해하였다. 3년간 시묘하였는데 죽은 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증직 받았다. 효비각의 구조는 정면 1칸ㆍ측면 1칸 맞배지붕구조의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 비지정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