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화성리 연공찬공적비(道安面 花城里 延公贊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6. 20. 08:38

도안면 화성7리 행화정마을 곡산연씨 연사종무덤으로 오르는 야산 오른쪽에 있는 곡산인 연공찬의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연공찬공적비( 統一主體國民會議代議員延公瓚功績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기에 존재했던 헌법기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설치되었다가 1980년 제5공화국 출범 직전 폐지되었다. 국민주권을 수임(受任)하는 기관으로 명목상 헌법 최고기구였지만, 이름과 달리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고, 국민이 주체적으로 직접 관여할 수도 없었으며, 회의도 하지 않는 기형적인 구조의 조직이었다.이 기구의 역할은 크게 3가지였다. 우선 대통령을 선거할 것, 관선 국회의원을 인준할 것, 국회에서 의결한 헌법개정안을 의결할 것이다. 이외에도 "통일 정책 심의" 등의 명목상의 업무가 더 있었다.

 

 -제8대 대통령선거(간접)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국회를 해산시키고,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이른바 유신헌법을 의결·공고했다.이에 따라 8대 대선은 전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의 무기명 비밀투표의 간접선거로 1972년 12월 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실시돼 박정희 후보가 무효 2표를 제외한 2,357표를 획득, 4선에 당선됐다.

 

-제9대 대통령선거(간접)
9대 대선도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실시돼 단일후보인 박정희 후보가 대의원 2,581명 중 2,579명이 참가한 가운데 무효 1표를 제외한 2,578표를 얻어 5선에 당선됐다. 

 

 -제10대 대통령선거(간접)
박정희 유신정권은 야당과 재야세력의 반유신운동을 불러 일으켰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살해됨으로써 유신체제의 4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서거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정부는 과도체제로 개편됐다. 이어 12월 9일 대통령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실시돼 재적의원 2,560명 가운데 2,465명의 찬성을 얻은 최규하 단일후보가 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그러나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의 구속과 함께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이른바 3김의 정쟁이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튿날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해 혼란이 심화됐다. 이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해 전두환 위원이 상임위원장에 임명되고, 최규하 대통령은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 제11대 대통령선거(간접)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1980년 8월 27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7차 회의가 열리고,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단일후보로 나서 재적의원 2,535명 중 2,525명이 참가한 가운데 무기명·비밀투표 실시 결과 2,524표(무효 1표)를 얻어 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12대 대통령선거(간접)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 의한 헌법 개정에 따라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서 무기명·비밀투표로 선출하게 됐다.1981년 2월 11일 대통령선거인 5,278명을 선출하는 선거에 이어 전두환(민주정의당), 유치송(민주한국당), 김종철(한국국민당), 김의택(민권당) 등 4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1981년 2월 25일 12대 대선이 간접선거로 실시됐다.선거인 총수 5,278명 중 실격된 1명을 제외한 재적선거인 5,277명 중 5,271명 이 전국 각지의 분산투표구에서 선거에 참가해 유효투표수 5,270표 가운데 전두환 후보가 4,755표(90.2%)를 얻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