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따라 삼천리/마을표지석

도안면 화성리 상작마을유래비(道安面 花城里 上爵마을由來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6. 18. 18:36

"선비를 꿈꾸는 붓마을 작다리" 라는 글이 새겨진 마을유래비와 붓을 형상화한 조형물입니다. 조형물의 건립년도는 2000년 12월 입니다.

 

화성4리는 작다리 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다.작다리라는   ‘상작’은 도안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900m의 거리에 있다. ‘상작’은 화성4리 ‘하작’과 함께 ‘작다리’로 불리는데, ‘새말장둑’이 경계이다. 즉 ‘새말장둑’ 북쪽은 ‘상작’이고, 남쪽은 ‘하작’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도 ‘상작달리(上爵達里)’와 ‘상작달하리(上爵達下里)’가 보인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에는 ‘상작(上作)’과 ‘하작(下作)’으로 바뀌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上作/윗작다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상작’이란 지명은 일제시대에 들어서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후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상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위작다리’는 ‘작다리’ 중 위쪽[북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작다리’는 ‘작달이’에서 변한 이름이라 전한다. ‘작달이’는 ‘벼슬 작(爵)’, ‘다다를 달(達)’을 합성한 지명으로, 세 명의 진사를 배출한 데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곡산연씨(谷山延氏) 가문의 연주운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또한 진사는 문과를 단념하더라도 지방의 지도자로 군림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게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한 마을에서 진사를 무려 세 명씩이나 배출했다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작달이’라고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유래비도 작달이라는 지명에 맞게 학문에 매진을 뜻하는 형상의 붓모양의 조형물을 세워 놓았습니다.

 

‘상작’은 마을 뒤쪽으로는 ‘매봉산’이, 우측으로는 ‘새말장둑’이, 좌측으로는 ‘작은재뿌리’가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앞으로는 화성천이 흐르고, 이 물을 이용하는 옥토가 펼쳐져 있다. 거기다가 충북선 철로와 36번국도가 함께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상작’의 농악은 옛날부터 유명하였다. 일제시대에 충북농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상으로 받은 파란 무늬로 제작된 농악기(農樂旗)가 40여 년 전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징,꽹과리,북,장고,소고,들메갓 등을 보관하고 있으며 농사철에 흥을 돋구기 위해 농악을 하곤했다. 농악은 주로 명절 때,매봉산 달마중 때,샘굿 때,가정방문으로 모곡(募穀)할 때 등 여러 경우에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풍물소리가 사라졌다.

 

마을 유래비 뒷쪽 으로는 작달이 마을의 지명을 만든 일인인 성균진사를 지낸 연주운과 그의 손자 연면회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 쌍정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