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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내고장풍경화둘러보기/향수고장 옥천군 (1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율티리는 도율리 북부에 위치 하며 동쪽은 서대리 가재봉 서편 기슭과 인접하고 남쪽은 도촌리와 평야지로 이웃한다. 서쪽은 용문산으로 용촌리, 북쪽은 평야지로 월외리와 접한다. 율티는 옛말로 밤티라 불렀다. 한자화 하여 밤 율栗 자와 고개 치峙를 써서 율티라 하였다. 이곳은 마을에 산이 많고 논과 밭이 적어 산을 이용한 옛 어른들의 지혜로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티라 부르게 되었다. 주작목은 한우 사육과 고추 등을 생산한다. 율티의 자연지명은 다음과 같다. - 밤티골: 밤티재 아래에 있는 큰 계곡이다. - 밤티재(율티, 栗峙): 율티리에서 용촌리로 넘는 밤나무가 많던 큰 고개이다. - 산제바위: 동골에 있으며 마을 산제를 지내는 곳에 있는 바위이다. 앞면에 또아리 모 양의 문양이 있다. - 동골: 밤티마을 앞..
만명리晩明里는 장수리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궁촌리, 남쪽과 서쪽은 무회리 남 부, 북쪽은 보청천을 경계로 산계3리 계하와 안임이와 접한다. 만명리는 만밍이, 마명으로 부른다. 마을 앞을 보청천이 동쪽에서 유입하여 마을을 지나쳐 서쪽으로 흐르는데 장 마철에 거대한 보청천 물길이 안임이 절벽에 부딪히며 바위 협곡을 울리는 소리가 마치 말의 울음처럼 들려서 ‘말 밍이
궁촌리는 청성면 서쪽에 위치하며 면적은 3.38㎢,이다. 옛날 청산현의 남쪽 관문인 남대문재(궁촌재) 아랫마을로 보청천이 앞에 흐른다. 동쪽은 소서리, 서쪽은 장수리, 남쪽은 지방도가 통과하는 궁촌재가 위치한 남대문산을 경계로 삼남리로 나뉜다. 북쪽은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산계리와 접한다. 궁촌리는 원래 조선시대 청산현 남면 무회리無懷里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옥천군에 통합되었다. 갑오개혁 때 청산군 청남면 무회리였다가 옥천군 청남면 궁촌리로 바뀌었다. 이후 1929년에 청남면은 청서면과 함께 청성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유래는 뒷산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하여 활골, 또는 궁촌대라 부르다 마을 이름이 되었다.이 마을에 논이 많아 벼농사와 인삼을 재배한다. 문화유적으로 궁촌 마을 ..
도덕리는 도근리(道根里)와 덕곡리(德谷里)를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덕곡리에 76호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1891년 기록에는 덕곡리가 세개리로 분구되어 덕곡리에 16호, 도근리에 29호, 송정리에 22호가 살았다고 되어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덕곡리와 도근리를 합하여 도덕리라 하고, 송정리(松亭里)는 청정리(淸亭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실은 덕양서당(德陽書堂)이 있는 마을로 인평대군의 사부였던 덕곡 유식(德谷 庾拭) 공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며 유석선생 유허비가 있다. 덕이 있는 군자들의 모임인 대동낙원을 꿈꾸었던 마을은 오늘까지 그 맥을 이어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덕실이라 불리고 있다. 덕실마을 주변에는 갈고개, 모산고개, 구릉고개, 절골..
증약리(增若里)는 원래 군북면 증약리로 불리워 오던 마을이다.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군내에서 가장 많은 287호가 살았으며. 이때는 이백리와 자모리까지 관할하였다. 1891년의 기록에는 증약리에는 증약리를 자모리, 비하동리 등 3개리로 나누어 증약리에 172호가 살았는데 이때도 이백리를 관할하였다.1908년 군,면 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어 증약리는 군북일소면의 소재지였다. 1914년 다시 군북면으로 고치면서 증약리를 이백리와 증약리로 나누었다. 증약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 증약찰방역(增若察訪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증약찰방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까지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달령(馬達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