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청풍문화재단지
- 충주박물관
- 단지주혈
- 곡산연씨
- 밀양박씨
- 상당산성
- 공산성 선정비
- 영모재
- 현충시설
- 효자각
-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박물관
- 경주김씨
- 부도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충북의 문화재
- 화양동 암각자
- 문경새재
- 각연사
- 사과과수원
- 사인암
- 보성오씨
- 국립청주박물관
- 법주사
- 부여박물관
- 효자문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화양구곡
- 선돌
- 공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16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날씨가 덥다. 더운 와중에도 벌판에 모들은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오랫만에 다시 찾은 남하리 석불은 언제나 그렇듯 반가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민속체험관에서 행사에 앞서 주위를 정리하나 보다 주위가 조금은 산만하니 정리가 한참이다. 남하리 석조미륵보살입상군(南下里 石造彌勒菩薩立像群)은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가다 남하2리 미륵마을의 민속체험관 옆에 위치해 있다. 이중 가장 큰 불상은 아랫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으나 현재 땅 위에 노출된 높이는 3.5m이다. 머리에는 관대가 있는 비교적 높은 보관(寶冠)을 썼는데, 두 귀 위에 장방형의 홈이 있어 보관(寶冠)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나 보아도 참 듬직하다는 표현이 좋다.가까운 거리에 있는 광덕사 석불..
사곡3리(射谷三里) : ㆍ방곡(芳谷) : ‘궁전’에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에 ‘방곡리(芳谷里)’란 기록이 보인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방곡(芳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마을을 ‘방골’로는 부르지 않지만, ‘방곡’은 대부분 ‘방골’과 대응된다. ‘방골’은 ‘방’과 ‘골’로 나뉘며, ‘방같이 아늑한 마을’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마을은 삼태기 속에 들어앉은 형상으로, 앞쪽[남쪽]만 트이고 삼면이 막혀 있다. 따라서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준다. ㆍ안골뱅이골[-房-]/작은방곡(-芳谷) : ‘방곡’ 남쪽에 있는 ‘사곡교회’ 일대를 일컫는다. 교회 외에 1가구가 거주한다. ‘안골뱅이골’은 ‘안골방이골’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골방..
비의 상태는 양호하며 관찰사이공겸재선정비(觀察使李公謙在善政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의 옆면에는 비의 건립시기인 병진년(1856)이 음각되여있다. 비의 하부는 현재 땅속에 매몰되여 있다. 이겸재는 한산인이며 자는 공익 이며 (1800~1863년) 순조27년(182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ㆍ이겸재선정비(李謙在善政碑)는 ‘은행정’에서 괴산군 사리면으로 넘어가는 1km 지점 고개 밑 좌측 도로 가에 있다. 본래 1796년 9월에 ‘서낭댕이’ 곁에 세웠는데 도로공사를 하면서 서낭이 없어지고 그 곁에 있던 선정비도 뽑혀 방치해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비의 전면과 측면에는 ‘관찰사이공겸재선정비병진구월일(觀察使李公謙在善政碑丙辰九月日)’이라고 쓰여 있다.이겸재는 한산이씨로 형조참판을 역임..
율리(栗里)는 본래 조선시대때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에 속했다. 정조 13년(1789)에 간 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기록 에는 충청도(忠淸道) 청안현(淸 安縣) 남면(南面)에 27개의 동리 (洞里)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율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기리(三岐里), 율치리(栗峙里), 봉천리(奉天里) 등 3개리가 있었다. 삼기저수지를 둘러볼수 있도록 목조데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족나들이로 참 좋은 곳입니다.
봄이다. 차창을 열고 달려도 추운 기운을 느낄수가 없다. 되려 창문을 닫으니 더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낭성면 쪽에서 증평으로 너머가는 고갯길에서 바라다 본 삼기저수지의 풍경속에도 봄이 담겨져 있는것 같다. 언제나 시간되면 찾을수 있는 곳이다. 삼기저수지 주위로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전원주택단지도 보이고 많은 변화가 있다. 저수지에 만들어 놓은 둘레길을 걷는 시민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저수지를 주변으로 하여 만들어 놓은 목책길이 참 보기에 좋다. 이 곳까지 왔는데 율리석불은 보고 가야지.... 몇 번이고 발걸음 한곳이지만 언제나 봐도 좋다. 이 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입상으로서 본래는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있었는데 1979년 7월에 삼기저수지가 완공되어 수몰되게 되자 지금의 위치로 ..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에서 1919년 4월10일 오후 5시경 약 3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일제경찰은 독립만세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무력탄압하였고 그 와중에 1명의 순국자가 발생하였다.2019년 12월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입니다. 1919년 4월 12일 일본고등경찰이 조선총독에게 보낸 문서에는“1919년 4월 10일 충북 괴산군 광덕리(현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에서 약 300명이 폭민운동을 개시해 총검으로 해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이는 같은 날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보낸 보고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증평을 빛낸 독립운동가도 여럿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