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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 (159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상당구 지북동 지북동문화생활관앞 길가 한쪽에 서있는 입석입니다. 지금은 동네에서 따로 지내는 동제등은 없는 듯 보입니다. 선돌은 지석묘(支石墓,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부터 이루어진 거석(巨石)기념물이며,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는 신앙의 대상물로 종교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복합적으로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선돌은 세워진 양상에 따라 선돌 단독으로 세워진 것, 선돌이 짝을 이루며 세워진 것, 선돌과 돌탑 등 복합형태로 있는 것 등으로 확인되며, 이 중 짝을 이루며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선돌의 형태·부르는 명칭 등에서 뚜렷한 성(性) 구별이 가능하고, 선돌이 서 있는 곳과 세워진 양상은 선돌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데, 선돌의 기능은 풍요기능·벽사(辟邪)기능·무덤 표지(標識)로서의 기능 ..
미원면 미원리에 있는 미원돗대 유래비입니다. 설명문에 의하면 미원의 형국이 배가는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땅의 기운을 돕기위하여 세운것으로 일명 보대라고도 부른다. 미원이 마한의 엣땅이라 본래 솟대를 세웠으나 전설에는 옛날마을에 재앙이 그치질 않아 돛대를 세우니 그 때부터 편안해 졌다고 한다.돛대는 처음 장터에 서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인하여 철거하게 되니 고장의 안녕과 번영을 염원하는 주민들의 뜻을 모아 옛 민속을 계승하여 이 곳에 돛대를 옮겨 세웠다.2005년 10월 일.
청원구 북이면 호명리 동리입구에 있는 인동장문 충효각입니다.호명리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 지역으로 예전에서부터 호랑이가 울고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희미하고 주변 큰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다. 특히 삼보산은 그 앞이 마을 뒤가 되는데, 인동 장씨 중시조의 산소를 모신 산 형국이 범의 얼굴 형상을 띠어 그 산형을 따서 호오리라 이름 지어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동은 증평읍 원평리이고, 서는 선암리, 남은 숙정리, 북은 증평읍 남하리에 접해 있다. 호명리의 자연마을은 양달말, 음달말, 새태말이 있다. 북이면 호명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935년에 장경달(張慶達)의 충절과 장문창(張文昌)․장순급(張舜汲)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
김원효자각은 확실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청원군 수대리에 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그 이유로는 지금도 많은 정보에는 김원의 효자각은 수대리로 표기되여 있기 때문이다.청주와 청원군이 통합된 통합청주시 문화유적 비지정문화재 효자문편에도 아직도 남이면 수대리로 적혀있으니 말이다.북이면의 김원의 효자각을 다녀온지가 햇수로 4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정보가 수정되지 않고 있으니 이게 뭐하는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문화재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현지 답사도 한번 없이 그냥 표기를 하나보다. 이 효자각은 조선 효종 6년(1665)에 내자사정(內資寺正) 오교(午橋) 연안인(延安人) 김원(金瑗, 1568~1636)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지금의 효자각은 1955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번역문】 시조태위공신도비명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부자가 있게 되어 있고 부자가 있어서 낳고 또 낳아 연속하여 감으로 천만 년이라도 세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서자(書字)로써 기록된 증거가 없으면 하는 수 없이 들은대로 본대로 그 세대일을 기술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세이다. 우리나라 대성(大姓)에는 반드시 한씨(韓氏)를 지칭하게 된다. 은태사(殷太師,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그 후손 중에 성을 얻은 자가 3인인데 한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후 천수만 년을 지나 태위공(太尉公) 때에 이르러서 비로서 호서지구인 청주에 정착하셨으니 이 어른이 바로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가 되시니 대체로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말과 고적을 살펴 보아서 확연히 알 수가 있는 바이다.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