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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
청천면 화양동 금사담가 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곽용종郭瑢種의 이름각자입니다. 곽용종에 대하여는 자세한 사항은 알수 없습니다. 다른글씨에 비하여 글씨의 크기도 작고 각선이 깊지 않습니다.자세히 보아야 알수 있습니다.
청천면 화양동 금사담가에 있는 커다란 암석에 각자되어 있는 장석구張錫龜의 이름각자입니다. 장석구에 대하여는 자세한 사항은 알수가 없습니다.
화양구곡의 제 4곡인 금사담옆에 자리한 암서재 뒷편 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여산인 송주헌宋柱憲의 이름각자입니다. 송주헌 자 정섭(宋柱憲 子 貞燮)이라고 각자 되어 있습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04-19『三乎齋集』(국립중앙도서관[古3648-39-63]) [行狀]을 참고하여 생졸년, 출신지, 가계 정보를 추가함.[수정자: 이재옥] people.aks.ac.kr 암벽에는 이름이 정섭 貞燮 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는 정섭 廷燮 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1852년(철종 3)~미상..
금사담이다. 뜻풀이를 한다면 금빛모래 고운 연못이라는 뜻일게다.화양계곡의 파천에서 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이 잠시 숨을 돌리고 쉬었다가는 곳. 그 곳에 금사담이 위치하고 있다.송시열이 작은 초옥을 짓고 화양동에 은거하며 지내던 곳이다. 후에 송시열을 따르던 우암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의하여 이름지어진 암서재가 있는 곳이다. 흐르던 계곡물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에 물속에 금빛 모래가 있다. 아마 그래서 금사담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송시열은 이 곳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금사담이라는 암각자는 암서재 바로밑에 암벽에 각자되어 있습니다. 화양구곡의 각 이름은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가 명명하였으며 민정중이 각자하였습니다. 제 1곡인 경천벽을 시작으로 9곡인 파천에 이르기 까지 전서체로 각자된 이름을 찾..
정태현이 충북관찰사를 지낼 당시 아들인 의현과 함께 이 곳 화양동을 방문하여 금사담가 암벽에 이름을 각자하였습니다. 관찰사정태현자의현(觀察使鄭泰鉉子谊賢) 이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정태현은 대한제국기 충북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관료입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여칠(汝七).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현감(縣監) 정재범(鄭在範)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羅州林氏) 임병조(林炳祖)의 딸이다. 백부인 감역(監役) 정재행(鄭在行)에게 입양되었다. 1883년(고종 20) 천거로 동몽교관(童夢敎官)이 되고, 1886년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가 되었다. 1894년 동학난이 일어나자 두동(杜洞)으로 들어가 살면서 어려운 친척들에게 토지를 떼어주고 동리의 어려운 자들을 모두 도와주니 목비(木碑)와 석비(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