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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효자문 (4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유희원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유인수의 후손이며, 유학원(柳学源)의 형이다. 유희원(柳希源)[1769~?]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책을 보면서 밤을 밝힌 채 잠시도 곁을 비우지..
영동군 향토유적 제 53 호 매한손(梅漢孫)은 조선초의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선조(先祖)는 원래 중국사람으로 고려말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이곳 황간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 이후부터 자손들이 이곳 매곡면 노천리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매한손은 원래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공손하며, 품행이 바른 사람으로 부친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병을 낫게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 강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병석의 부친을 받들어 모셨다. 중종 14년(1519년) 매한손의 효성을 전해들은 조정에서 그에게 충순위(忠順衛)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정문을 세워 후손들이 본받도록 하였다. 세월이 흘러 정문이 퇴락하고 무너지자 노천리 주민들이 그의 효행을 영원히 기리고자 1946..
이 정려문은 효자 임계번(1449-1523)과 그의 처 백천유씨(白川柳氏)의 것으로 중종 20년(1525)에 건립하였던 것이나, 영조 21년(1745)에 중건하고 정조 15년(1791)에 다시 중수하였다. 임계번의 자는 백영(伯英), 본관은 임하(臨河)이다. 성종 14년(1483) 진사가 되고, 연산군 3년(1497) 효행으로 추천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 1515년 주부(主簿),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봉양하매 효성을 다하고 약을 끊지 않으니 인근에서 모두 효자라 하였다. 임계번의 처 백천유씨는 유연년(柳延年)의 딸로 남편을 공경하고 시부모를 모심에 지성을 다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예로써 복상하니 함께 정려되었다. 정려각 안에는 민종현(閔鍾顯)이 지은 정려중수기「..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흥(長興). 고려시대 대사헌(大司憲) 임헌의 딸이며, 박순(朴淳)의 처이다. 1402년(태종 2) 함흥차사로 함주(咸州)로 내려간 남편 박순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권국화의 정려문이다. 권국화에 대한 기록으로는 『순조실록(純祖實錄)』에 1831년(순조 31) “유생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증직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무신년(1728) 당시 집에 역도가 난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