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충북의 문화재
- 문경새재
- 화양동 암각자
- 법주사
- 국립청주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 상당산성
- 문의문화재단지
- 영모재
- 사인암
- 각연사
- 현충시설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보성오씨
- 공산성 선정비
- 경주김씨
- 효자각
- 단지주혈
- 공주박물관
- 선돌
- 충주박물관
- 곡산연씨
- 사과과수원
- 화양구곡
- 효자문
- 부여박물관
- 밀양박씨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부도
- 청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377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만남이란 무엇일까? 몇번이고 찾고 찾았던 괴산군수 김경근의 비석. 무엇이 그리 애착심을 가졌을까? 괴산군에서 발간된 괴산군지에 단 한줄로 인용되었던 김경근의 애민선정비. 어찌보면 선정비라는것이 많은사람들로 부터 외면받는것은 이해하지만 하나하나의 존재는 그 이유가 있고 그 느낌이 있는것 같다. 신경쓰지 않으면 찾을수 없는 감경근의 선정비. 어찌보면 그 선정비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을 떠나 잊혀져가고 생각의 횟수가 적어지는 아픔을 겪는 그 나름의 부족함을 누군가가 찾아보는 빌길로 채워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바램이었다. 원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 기억의 저편쪽으로 사라져가는 괴산군수 김경근의 비석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를 해본다. 정말로 많이 지나다니며 몇번이고 그 곁을 다녔지만 발견할 수 ..
가덕면 청룡리 사지에 남아 있는 폐석탑으로 각부가 많이 결실되고 파손이 심한 편이다. 사지였던 민가 앞마당에 유존하며 현재 2개의 옥신석과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조성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되며 현재의 높이 80㎝이다. 2층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지 않았으며 폭이 매우 좁고 초층 옥신석과 비례가 맞지 않아 제짝이 아닌 듯하다. 2층 옥개석도 체감이 급격히 줄어 역시 초층 옥개석과 비례가 맞지 않으며 층급받침은 3단을 이루었다. 이로 보아 중간에 3층정도의 탑신부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다른 석재들을 올려놓은 것으로 석탑부재가 아니다. 조성시대는 각부의 조각수법이 퇴화한 점으로 봐 고려말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전체높이 80cm, 초층옥개석폭 45cm이다. 청용리사지는..
1677년(숙종 3)에 동부주부를 지낸 백석정 신교(白石亭 申灚)가 낭성면 관정리 지담가 바위 위에 세운 정자이다. 1927년 문중에서 중건하고 1987년 보수한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에 쪽마루를 깔고 통난간을 둘렀다. 현재 백석정에는 편액이 두 개만 걸려 있고, 많은 기문과 제영은 고령 신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亭於白石 因以名亭 吾從叔所手刱 從叔少也 負奇氣 有萬里心 俄而倦於世 還四方 事如少游 盖嘗取叱咤者 而溺其竅爲嘯歌 回其駕長風破巨浪者 而理漁釣行募地 得墨之左白石 石臨溪陡 起四五丈 北去沙灘 三百武而近 南望石峰 二里而遙 雖谺側而騁眺遠 後有太古松 輕涼逼而淸陰森然 遂鑿山而通逕 就石上 架而爲亭以綰之 其左爲燠室二楹 不易月而翼然 龍頭簇椽 獅背負檻 丹雘耀日 宛..
미원면 수산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판리, 송교리, 원산리와 외삼곡리, 대판리, 수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곡과 원산의 이름을 따서 수산리라 하였다. 1987년 행정리동 분리로 너더리, 숫골, 스실을 수산1리로, 원미를 수산2리로 분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원면 수산리 원미마을에 있던 고인돌로 도로공사로 인하여 길가에 방치되어 있다가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문의문화재 단지로 옮겨서 전시되고 있습니다.고인돌은 공사중 파괴 되었으며 현재는 뚜껑돌만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주박불관 특별전시관에 있는 법고대(法鼓臺)의 받침대입니다. 재질은 나무이며 익살스러운 해태를 형상화 한것으로 보입니다. 죽림사(竹林寺)라는 글씨를 볼수가 있습니다. 죽림사라는 절에서 사용하던 법고대의 나무받침대 입니다. 법고(法鼓)란 사찰에서 불교의식 등에 사용하던 북을 가리키며 법고좌란 그 북을 설치하고자 만든 대좌로서 법고대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법고좌는 대개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거나 해태의 형상을 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호암지를 대대적으로 축조할 때 여러가지 사고등으로 죽은 일본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으로 전해 집니다. 특히나 일본인 잠수부가 공사를 할 때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아마 그 일본인을 기리기 위한 탑이 아닌가 합니다. 자연암석을 세워 위령탑(慰靈塔)이란 글씨를 각자 하여 놓았습니다. 1937년 5월23일 자와 25일자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충주수리조합 호암제에서 통관(桶管) 파손 수리공사를 하던 인천 조일조(朝日組) 잠수부 고하만치(古賀萬治·44)씨가 5월 17일 익사하자 닷새 만에 한국인 제자 김성손(27) 씨가 높은 수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신을 건져냈다. 충주수리조합은 조합장과 충주군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를 지낸 뒤 고하만치씨의 매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