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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이국헌 (1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타사 오르는길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숙종시절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공적비입니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지명 또한 비선거리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소이면 비산리 비석거리에 있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두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나 모양등으로 보아 한사람의 솜씨인 듯 합니다. 이국헌이 충주목사로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후임으로 충주 목사로 온 사람이 엄찬입니다. 엄찬은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겸충주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전임 충주목사 이국헌(李國憲)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런데 이국헌의 후임으로 온 충주목사 엄찬까지도 꾸짖고 욕보이자, 엄찬이 이국헌..
그 동안 이채청목사의 비로 알려진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 소이면 비선거리에 당시 후임자로 온 엄찬의 비석과 함께 서있습니다 음성디지털문화대전등에는 조선순조시절의 이채청의 비로 소개가 되어 있는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두개의 비석이 생김새나 글씨등이 비슷하여 하루 시간..
참 행복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마음속에 게으름 탓이리라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한데 그 게으름을 이겨내려는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했다. 이렇게 또 이국헌이란 이름의 선정비는 세상에 빛을 본다. 나의 조그만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준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충주목사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엄찬의 공적비와 같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국헌과 엄찬은 어찌 보면 서로가 철천지 원수일테니 말입니다. 이국헌이 육방관속에 의해 의문을 죽음을 당한 후 이국헌의 아들은 여러방법으로 육방관속을 경옥에 가두는 이야기가 승정원일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국헌이 죽은후 충주목사 후임자가 엄찬이지요 엄찬이 충주목사로 부임을 하자 일설에 의하면 이국헌의 아들이 엄찬에게 아..
엄찬(嚴纘)은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입니다. 비석은 일체형으로 비석의 크기등에 비해 각자된 글씨는 작고 조금은 비석의 당당함이 없습니다. 비석의 형태등으로 보아 두 비석은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느낌입니다 음성군지에 의하면 엄찬공적비외에 또 다른 비석은 고종조..
원사락 아랫담 뒷산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연안인 이국헌의 묘지입니다. 산소앞에 서있는 비는 2004년 4월 11일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은 “증 통정대부 충주목사 연안이공 국헌지묘(贈 通政大夫 忠州牧使 延安李公 國憲之墓), 배숙부인 전주이씨부(配 淑夫人 全州李氏祔)”라고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돌이끼가 돋아난 것으로 보았을 때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위 부분의 조각이 정교하게 잘 남아있다. 이국헌의 묘지에는 상석과 후손들에 의해 근간에 세워진 비석과 망주석2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국헌에 대한 묘 주변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충주 목사(忠州牧使) 재임시(1691∼1692)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청백리(淸白吏)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하였는데 6방관속(六房官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