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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장안면 장내리 동학취회지(長安面 帳內里 東學聚會址) 본문
구한말 동학은 하나의 희망이였다.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세상의 꿈을 가르치는동학은 억압과 수탈에짓눌린 민초들에게는구원의 소리였던 것이다
들불처럼 번진 동학이 커다란 함성이 되어 처음 세상을 진동시킨 곳이 장안면 장내리이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교주최제우의 신원운동을 벌이던 동학교도들이 1893년 3월 교주 최시형의 통문에 따라 장내리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무려 23,000여명의동학교도들은 척왜양창의라는 깃발을 내걸고 삼가천의 자갈돌을 모아 성을 쌓은뒤 농성을 하였다
농성은 정부의 회유와 관군의 압박으로 보름만에 해산하게 되었지만 장내리에 모여 들었던 동학교도들의 가슴에는 이미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보은의 북실은 동학군의 함성이 마지막으로 눈발에 묻혀 사라진 곳으로 최근 추모공원이 만들어졌다
보은은 동학혁명의 시작이며 끝이였다.
동학대도소터(東學大都所址)와 취회지(聚會址)
1893년 1월 옥녀봉 아래에 설치하였던 동학 본부였던 대도소(大都所)가 있었던 터다. 건물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894년 10월 14일자에 기록된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의 기록에 의하면 “동리가 즐비하고 새로 지은 큰 집이 주산 아래 있는데 최법헌이 거처하던 곳이라(洞樣?比而新造一座大屋于主山之下比崔法軒之處所云)” 표현된 것으로 보아 매우 크게 지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도소가 있었던 장내리 29번지 동쪽이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1백여 걸음이나 되고 높이가 어른의 허리쯤 되는 돌담을 쌓고 모두 그 안에서 농성하며 주문(呪文)을 외우고 “척왜・양창의(斥倭 洋倡義)”, “보국안민”과 “서정쇄신”을 주장한 동학교도 취회지(東學敎徒 聚會址)로 모인 당시 모인 교도의 숫자에 대하여는 “동학란기록”에는 2만여명 “일본외교문서”에는 2만 3천명, “광서조중일교섭사료”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앞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7만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상이하다. 현재는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고 대도소 자리에서는 기와파편이 발견되고 취회지에는 당시 돌담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의 유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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