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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내고장풍경화둘러보기/향수고장 옥천군 (1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답양리에서 막지리쪽으로 길을 재촉하다보면 오른쪽 산 입구에 용호리 용강사라는 이정표를 볼수가 있습니다.이정표를 뒤로 하고 시멘트 포장길과 비포장 산길이 섞여 있는 차량 한대 통행할수 있는 임도를 따라 십여리 길을 가면 만나는 동네가 용호리 입니다. 용호리(龍湖里)는 원래 안내면 화일리(회일)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용호리라 고치고 행정구역도 안내면에서 군북면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 보면 안내면 화일리라 하여 14호가 살았고, 1891년에는 25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 조정하면서 안내면 용호리라 이름을 바꾸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내면에서 군북면으로 그 관할이 바뀌었다. 용호리는 쑥마루 마을 강가에 큰 늪이 있어 이 늪에서 용 이..
연자맷돌에 오덕마을이라 각자하여 자연석위에 올려 놓았습니다.까만 오석에 오덕마을 자랑비를 새겨서 동네초입에 설치하였습니다.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마을자랑비를 꾸며 놓았습니다. ●위치와 연혁 오덕2리는 오덕리 서북부에 위치하며 금적산과 듬치재 아래 중산간 마을이다. 동쪽은 오덕1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안남면 도농리, 서쪽은 듬치재와 금적산 기슭으로 정방리 및 도이리와 접한다. ●마을유래 안덕의 ‘안’은 안에 있다는 뜻으로 가운데라는 말이고, ‘덕’은 언덕이나 높은 곳을 뜻으로 ‘안 골짝 언덕에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안덕이를 한자화하면서 발음 그대로 안덕安德다. 금적산 남쪽 듬치 산기슭 아래 자리잡고 자연마을은 안지목, 새뜸이, 양짓말이 있다. 산촌마을로 벼농사와 밭작물, 사과 등 과수농사를 짓는다. ●주..
고당리는 옛 기록이 없어 그 연혁을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란 때 유(劉)씨(유득송)가 처음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울창한 송림 속에 함지박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말만 전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할 때 고당리라 하여 옥천군 청남면에 속해 있다가, 1929년 청성면이 생기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당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서 한 마을로 이름 지으면서 고현(高峴)의 고(高)자와 원당(元堂)의 당(堂)자를 한자씩 취하여 고당리라 하였다. 고현(高峴)은 “높은베루”를 한자로 쓰면서 높을 고(高), 고개 현(峴),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고현이라 하였는데 원뜻은 “벼루”란 옛말로 “벼랑” “언덕”이란 말이 되므로 “높은 벼랑”이란 뜻이다. 이곳 지형을 볼 때 “높은 벼랑..
도율리는 도촌(道村)과 율티(栗峙)가 합하여진 마을로서 옛기록에 이 마을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때 도가실과 밤티를 합하여 도율리라 이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말 현재 도촌에 55호 138명, 율티에 37호 67명이 살고 있다. 도율리라 이름 짓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치면서 도촌마을의 도(道)자와 율티의 율(栗)자를 한자씩 취하여 도율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촌은 원래 “도가실”을 한자화할 때 발음대로 “도”를 길도(道)로, “실”을 마을촌(村)으로 사용하여 도촌(道村)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옥천~보은의 옛길은 이곳을 지나 월외~장선~동정~회인(보은)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쉬어가거나 물건을 받아가는 도가(都家)가 있어 이 마을을 도가실이..
화학리는 화일리(禾日里)와 학촌리(鶴村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화일리라 하여 74호가 1891년 기록에는 화일리에 22호, 학촌리에 29호 등으로 분구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일과 학촌이 합하여 화학리(禾鶴里)가 되었다. 1981년 엽송골, 마느실, 학촌이 화학1리로 수일이 화학2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일(禾日)리는 수일(壽逸)이라고도 하는데 나이가 많은 고령자가 많기 때문에 수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벼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화일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분명치 않다. 화일리는 1972년부터 마을원로회의를 구성하고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실행을 위해 온 마을이 단합하는 모범을 보여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오는..
삼남리는 청성면 남부 중앙에 위치한 고지대 마을로 남쪽 방면에서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 요지이다. 면적은 4.99㎢, 인구는 109명이다. 동쪽은 영동군 용산면과 소서리, 서쪽은 양저리와 묘금리, 남쪽은 조천리, 북쪽은 장수리와 궁촌리와 인접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여지도서』 기록에 청산현 남면 조분리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때 청산 군남면 조분리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을 옥천군에 통합시키고 삼거동三巨洞과 차남리車南里를 합쳐 처음 삼남리三南里를 신설하고 옥천군 청남면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하였다. 삼남리는 삼거리와 차남리를 합할 때 삼거리의 석 삼三 자와 차남리의 남녘 남南 자를 한 자씩 따서 삼남리라고 하였다. [주요지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