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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화사( 淸州 龍華寺) 본문
[1980년대 용화사석불군]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무심천(無心川) 변에 있는 평지 사찰.
[설립경위]
상량문에 따르면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빈 엄씨의 꿈에 물에 잠겨 있는 미륵불이 나타나 구해주기를 청했는데, 청주군수 이희복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 며칠 뒤 청주군수에게 꿈에 본 7체불을 자세히 조사해 보라는 엄비의 명이 내려왔다.
이에 무심천(無心川) 풀숲에서 묻혀있는 7구의 불상을 발견해 엄비에게 보고하니, 1902년 엄비가 내탕금을 하사해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옮겨 불상을 안치하고 용화사라고 불렀다.
[변천]
창건당시 사찰 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3칸, 설교전 15칸, 요사 4칸 등으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1907년부터 한동안 청주재판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1935년 화재로 법당이 전소돼 신축했으며 1950년 한국동란으로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는 병화를 겪는다.
6.25전쟁 이후 노천에 방치돼 있던 7구의 석불상들은 1972년 콘크리트로 옥상이 있는 단층 구조로 새 법당을 조성해 비를 가리게 된다.
현재 용화사 석불상군은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조성한 목조건물인 용화보전에 봉안돼 있다. 용화보전은 안이 통해 있는 2층 형태로 설계돼 높이가 최고 5.5m에 이르는 장육불 등 대형 불상들과 조화를 이룬다. 석불상군 뒤로는 1000구의 작은 불상을 봉안할 수 있도록 천불감을 조성했다.
용화사는 이밖에도 1987년 범종루를 조성했으며, 1996년 용화보전 준공과 함께 팔각오층석탑을 세웠다. 용화보전의 양쪽 귀퉁이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부재가 남아있다.
[현황]
용화사는 청주 중심가에 위치한 평지 사찰로 법회 일에 관계없이 기도처로 각광을 받고 있는 도심 사찰이다.
1993년 용화사 인근에서 무려 400여점에 이르는 사뇌사 유물[사뇌사 일괄유물]이 한꺼번에 발견된 점으로 미뤄, 용화사 석불상군과 사뇌사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계종 2대조인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어록에 따르면 고려 무신란 때 수선사결사(修繕社結社)를 주도했던 진각국사 혜심이 사뇌사에서 하안거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직]
신도조직으로 거사림회와 신도회, 여신도들의 봉사모임인 보현회, 합창단 등이 있다. 용화사 부설 충북불교대학을 통해 포교사 양성에 주력하고 있으며, 충북불교대학 동문회도 용화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조직이다.
...디지털청주대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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