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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효비각(慶延孝碑閣) 본문
[정의]
조선 중기의 효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대유(大有), 호는 남계(南溪)이다.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의 7세손이며 좌랑(佐郞) 경신직(慶臣直)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학식이 고명하고 만고의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청원군 남일면 모산(茅山)에서 살았다. 조선 세조 임금 때에 조정(朝廷)에서 불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병을 고친 일이 있다. 부모상을 당하여 묘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간 죽을 먹고 소찬을 씹어 예를 다하며, 제사를 받들기를 가례대로 하고 아내와 함께 손수 제사자리를 장만하니, 이웃이 모두 교화되었다.
1478년(성종 9) 조정에서 불러 사재주부(司宰主簿)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에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가니 관원과 백성들이 모두 존경하고 외애(畏愛)하였다. 선생이 살고 있었던 이웃에 양수척(楊水尺)이란 사람이 있었다. 양수척은 평소에 부모를 잘 섬기지 않았는데, 선생의 효에 감화되어 뒤에 효자가 되었다. 선생에게 감화되어 효자가 된 양수척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가 지금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비선마을 입구에 전하고 있다.
선생이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장사지낼 물품을 보내왔는데 그 아내가 말하기를 “어찌 남편의 청덕(淸德)에 거리낄 일을 하겠는가?” 하고 받지 않았다.
중종조에 청백리에 녹선(錄選) 되었다. 그가 여러 번 조정에 소징(召徵)당하므로 징군(徵君)이라 칭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가 살았던 곳을 효촌(孝村)이라 부르고,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에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이 지은 효자비와 정문(旌門)이 남아 있다. 청주 신항서원에 제향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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