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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중앙공원 본문
청주시내에 자리한 중앙공원이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알맞게 내려쬐는 햇살에 조용한 중앙공원이다
고령화시대로 접어 들면서 많은 노인분들의 휴식처로 이름이 높은곳이다
청주목 관아의 누각이다
오랜세월을 지나면서 학교의 교실이나 관사등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되였다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는 은행나무인데, 압각수라는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물오리의 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오리발나무라고도 한다.
충북지정물 제5호로 지정되여있다 수령은 약 1000년정도가 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와 그 일당이 역성혁명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 ‘이초(李初)의 옥사(彛初獄事)’란 큰 사건이 있었다. 윤이(尹彛), 이초 두 사람이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명나라 세력을 빌어 이성계 일파를 타도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윤이는 자신을 파평군(坡平君), 이초는 중랑장(中郞將)이라 사칭하고 명나라에 들어가 ‘이성계가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다. 공양왕이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하는 것을 이색(李穡, 1328~1396) 등이 반대하자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옥, 정지 등을 유배하였다. 유배된 재상들이 자기들을 보내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 일파를 토벌해야 한다’ 고 무고했다. 이 무고는 명에 사신으로 간 순안군 방(順安君 昉)과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조반(趙畔)을 통해 본국에 알려져 큰 옥사가 일어났다. 우현보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고 이색, 이림(李琳), 정지, 이숭인, 권근(權近) 등은 청주옥에 갇혔다. 윤유린, 최공철, 홍인계는 옥사하여 효수(梟首) 되었으나, 청주옥에 갇힌 사람들은 불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하평리 윤호(門下評理 尹虎)를 보내어 이들을 문초하였다. 이때 큰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물이 차고 큰 홍수가 났다. 옥리와 죄수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때 죄수들이 올라가서 목숨을 구한 나무가 현재의 중앙공원내에 있는 압각수라는 것이다
목조(木造) 2층 누각(樓閣)인 병마절도사영문 (兵馬節度使營門, 충북유형문화재 제15호),
병마절도사 영문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본영을 드나들던 출입문의 문루(門樓)로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난 1976년 12월 23일에 지방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동향을 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목조 2층의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二翼工), 겹처마, 팔작집인데 4각의 고주석(高柱石)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누대(樓臺)는 정자(井字)를 깔았으며,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조서 후기의 전형적인 문루이다.
목사 서유민 선정비(牧使 徐有民 善政碑), 김효성(金孝誠, 1585~1651) 청백 선정비(金孝誠 淸白 善政碑)가 공원 화단 오른편에 있고 판독이 불가능한 선정비도 한 기 있다. 거북좌대 위에 세운 김효성 선정비는 ‘이수’까지 갖추었다. 비신위에 용머리 장식이 있으면 ‘이수’라고 하고 용머리장식이 아닌 덮개돌 형식이면 개석(蓋石), 비갓, 갓돌 등으로 불린다. 선정비의 이수 전 후면에는 용조각이 현란하다.
담장 가까이에는 돌거북 좌대 한 기가 있는데 중앙공원(中央公園) 후문 일대의 하수도 공사도중 나온 것으로 보인다. 돌거북의 형태는 희미하나 비신(碑身)을 세웠던 흔적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중 하나는 귀부(龜趺, 머리부분)가 약간 고개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국운이 한창 융성할 때 만든 비석의 귀부는 고개를 정면으로 치켜들고 비상이라도 할 듯 포효하는 모습이나 국운이 쇠퇴할 때는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고개를 틀고 있는 것이 비석의 일반적 형태이다.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였던 중봉(重峰) 조헌의 기적비(紀蹟碑)를 비롯하여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의 기적비,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 1544~1611) 선생의 기적비가 오른쪽 편에 줄지어 있다.
중앙공원(中央公園) 후문 쪽으로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 1883~1972) 송공비가 있다. 이 비석은 당초에 전면 비문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비문의 내용을 ‘의병장’으로 할 것인가 ‘의병대장’으로 할 것인가 난상토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봇물처럼 터졌는데 그중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인석과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신돌석이 대표적이고 청주지역에서는 한봉수를 꼽게 된다. 청원 북일면 세교리가 고향인 한봉수는 왜병에게 치명적 타격을 여러 번 가했고 청주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의병은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그 지도자도 ‘의병대장’이 아닌 ‘의병장’이 맞다고 본다. 송공비를 건립할 당시 이를 높여 ‘의병대장’으로 새겼다가 추후에 ‘의병장’으로 바꾸어 비석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개화의 물결이 소용돌이 칠 때 세운 척화비(斥和碑)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비석이다. 본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76년 2월 20일 정찬일(鄭燦日) 씨가 석교동 92-12 신충구씨의 집 앞 길가 하수도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신은 절단된 상태로서 높이 95㎝, 폭 46㎝, 두께 19㎝이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할 당시에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를 응징하기 위해 만든 척화비중의 하나다. 비문내용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등인데 중앙공원(中央公園)의 척화비에는 “양이(洋夷)”“즉화(則和)”등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풍상에 깎인 데다 무분별한 탁본 등으로 글자가 많이 훼손된 상태다.
멀리서 바라보는 중앙공원의 모습이다
따스한 날씨에 어르신들의 윷놀이 함성이 그나마 이곳에 활기를 넣는것 같다
참고...디지털청주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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