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단월동 이채불망비(丹月洞 李采不忘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단월동 이채불망비(丹月洞 李采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0. 12. 09:22

목사이후채청덕애민영세불망비( 牧使李侯采淸德愛民永世不忘碑 )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후면의 건립시기를 보면 가경(嘉慶)7년(1802년) 임술(壬戌)년 가을이다. 달천대교옆에 있던 것을 충주시에서 정비하면서 달천동과 단월근처에 산재되어 있던 비석들을 이 곳으로 옮겨 개립하였다.

 

이채(李采)는 조선 후기에 상주목사, 황주목사, 경주부윤, 승지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이다. 이재는 여흥민씨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조카로서,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780년까지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 음죽현감으로 활동하였으나, 1780년 이후로는 주로 향리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부 이재의 문집인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조선 후기, 상주목사, 황주목사, 경주부윤, 승지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제원(李濟遠)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홍중복(洪重福)의 딸이다. 이재의 조부는 우의정을 지낸 이숙이고, 부친은 이만창(李晚昌)인데, 모친이 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므로 인현왕후와 자매 사이가 된다. 이 때문에 이재 집안은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1752년(영조 2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1763년(영조 39)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부인 양주 조씨 조영순(趙榮順)의 딸 사이에서 광문(光文) · 광정(光正)의 두 아들과 황기찬(黃基瓚)과 박제현(朴齊賢), 김병규(金炳珪)와 혼인한 세 딸을 두었다. 측실에서도 광시(光始) · 광세(光世)의 두 아들과 김운순(金芸淳)과 혼인한 딸을 두었다.

1745년(영조 21)에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774년(영조 5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775년(영조 51)에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호조좌랑, 사헌부 감찰,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에 올랐다.

1780년(정조 4)에 음죽현감이 되었다가 잘못된 형 집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과거 공부를 중단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지례현감에 제수된 이후 선산부사, 상주목사, 충주목사, 나주목사, 황주목사 등 외직을 맡았다.

순조 대에도 여주목사, 풍천부사, 경주부윤 등 외직과 좌 · 우 부승지 등 승지에 자주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향리에서 조부의 문집인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20년(순조 20)에 타계하자 충주 족자동(簇子洞)에 장사 지냈다.

사후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서 아들 이광문이 가장(家狀)을 짓고 1826년경에 노주(老洲) 오희상의 묘갈명을 받았으나 바로 간행되지 못하였다. 1886년(고종 23)에 증손자인 이호익(李鎬翼)이 충주 목사 재임 중에 경비를 마련하여 16권 8책의 『화천집(華泉集)을 간행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채 [李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일기 1757책 (탈초본 93책) 정조 19년 12월 20일 정유 16/24 기사 1795년  乾隆(淸/高宗) 60년

○ 親臨都政。吏批, 以韓允鎭爲引儀, 朴正圭·李顯正爲司饔主簿, 尹光碩爲徽陵令, 申絢爲吏曹佐郞, 李性重爲蔚山府使, 沈逵爲連山縣監, 徐謙淳爲洪川縣監, 徐有臣爲大司憲, 李尙度爲大司諫, 崔烜爲司諫, 韓興裕爲掌令, 權思浩爲松禾縣監, 李宇絅爲保安察訪, 李顯宅爲吉州牧使, 吳文常爲南陽府使, 韓用和爲伊川府使, 柳相斗爲郭山郡守, 崔鳳諧爲幽谷察訪, 洪聖禧爲海美縣監, 李長演爲沙斤察訪, 宋煥章爲咸陽郡守, 李卿尹爲監察, 尹心約爲東部令, 金龍見爲黃海都事, 鄭敬行爲輸城察訪, 鄭時儉爲尙衣直長, 尹鎰爲平市直長, 崔奎晶爲司宰直長, 安㢞爲樂安郡守, 成殷柱爲平丘察訪, 鄭殷祥爲加平郡守, 安必濟爲平海郡守, 任希存爲春川府使, 趙榮儉爲龍川府使, 金在明爲工曹正郞, 尹秤爲引儀, 李宗恢爲內資主簿, 鄭重祚爲奉常僉正, 李錫心爲直講, 尹在益爲金井察訪, 鄭尙愚爲大司諫, 朴瑞源爲掌樂正, 朴命球爲軍資正, 朴宗龜爲宗簿直長, 李采爲忠州牧使, 廣興直長單尹載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