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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면 산척리 이상설생가(梨月面 山尺里 李相卨生家)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이월면 산척리 이상설생가(梨月面 山尺里 李相卨生家)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4. 7. 09:08

이월면 산척리에 있는 보재 이상걸 선생의 생가와 사당 그리고 묘지와 함께 근간에 세운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상설의 호는 보재(溥齋)이고, 자는 순오(舜五)이다. 선생은  학자인 이행우(李行雨)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7개 국어를 구사하였고 이시영, 이규형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무효를 상소하고 자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북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자녀교육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7년 니콜리스크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전 생애를 바쳐 조국의 국권회복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사진 멀리 근간에 신축한 이상설전시관이 보입니다.

 

 

사당인 숭렬사 앞마당에는 이상설선생숭모비와 함께 이상설선생의 전신조형물 그리고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상설 숭모비문李相卨 崇慕碑文 <원문> 지난날 한국 말엽의 비통한 역사 위에 덮쳐 오는 노도탁랑을 무릅쓰고 산같이 우뚝섰던 정기의 인물 한분, 그가 바로 저 유명한 헤이그 밀사 세 어른 가운데서도 정사의 사명을 띠 고 가셨던 보재 이상설 선생이시다. 나라가 기울어 나라를 울고 집을 버려 집을 울고 제 몸 또한 울어 세 울음의 슬픈 시를 읊었던 선생을 위해 나는 이제 선생의 풀지 못한 천추회한을 다시 울어 그 눈물로 먹을 갈 고 그 먹을 찍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니, 어찌도 연명이 깨끗한 국화 이슬로 먹을 갈아 그 먹 으로 조국 진나라 역사를 쓰던 심경에만 비길 것이다. 슬프다, 예로부터 모든 영웅 의사들이 비록 나가서 죽는데도 죽어서는 그 몸이 제 고장 으로 돌아온다 하건마는 선생은 죽어서도 못 돌아왔고, 한 조각 유물조차 끼치지 않아 우 리는 다만 아득한 하늘만 바라볼 따름이로되, 후세 만인의 선생을 그리고 우러르는 뜻이 결코 형상이나 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오 정신과 사상에 있을뿐더러 그 위에 선생의 48년 간의 생애가 바로 민족 정기사의 일절이라 그의 행적을 아는 것이 더 귀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 고종 7년 서기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 고을 동쪽 10리 덕산면 산척리에 서 태어나니 경주 이씨 가문 고려 말엽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 선생의 23대손으로 부친은 행우 공, 모친은 벽진 이씨, 7세에 동부승지 용우 공에게 입양하여 서울로 왔으나 13세 양 부가 별세하고 18시에 생부 또한 여의어 소년의 몸에 무거운 상복을 잇달아 입었건마는 꾸 준한 노력과 수양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갔던 것이다. 생의 학문은 놀랄 만한 진전을 보여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게 바로 동학혁명이 일 오난 갑오년이요,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 고등 수학, 법학, 의학 등에까 지 두루 통달하여 학계의 최고봉이 되었으며, 고종의 정치 고문 헐버트 박사와 친교를 맺 어 외국의 신간 서적을 섭력하여 구미 정치 사조에도 밝았던 한편, 관계로 나가서는 탁지 부 재무관으로부터 성균과 교수, 한성 사범 학교 교관, 홍문관 시독, 시강원 부담사를 지 나 궁내부 특진관, 외부 교섭국장, 학부·법부 협판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른 것은 을사 년 36세 때이었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종로에서 연설하 고 통곡하고 오적을 베어 국민들에게 사하소서 하고 불튀는 상소문을 위에 올림과 함께 벼 슬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4월 18일 서울을 벗어나 북간도로 망명하여 거기에 서전의숙을 세우고 동포 자제들을 교육하더니, 다시 다음해 서기 1907년 봄 블라디보스토 크로 가서 본국으로부터 아우 상익이 인도해 온 이준과 만나 베드로그라드로 전 공사 이범 진을 찾아가 상의하고 선생은 정사, 이준은 부사로 황제의 밀사 자격을 띠고서 통역하는 책임을 진 이범진의 아들 위종과 함께 3인 동행으로 극비리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도착하니 그것은 6월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적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조국의 독립 을 보장받으려 함이었으나, 마침내 밀사들의 피돋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또 기자 협 회 모임에서 연설한 것도 필경 보람없이 된 후에 7월 14일 이준 동지가 통곡하다 못해 피 3 장 유 적 과 유 물 375 를 토하고 순국하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선생은 그 길로 불국·독일·영국·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며 호소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블 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유인석과 함께 고종 황제를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하던 중 마침내 1910년 8월에 국치를 당하자 권업회를 설립하여 산업 진흥에 애쓰고 하바로프스크 로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 항쟁을 기도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그 계획 마저 꿈같이 사라져 가슴에 사무쳐 오르는 통분으로 침식을 잊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니 코리스크로 옮겨 신음하다가 이동녕 등 동지들에게 상해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과 그 유물은 모두 불태우고 유해는 가루내어 시베리아에 흩뿌리고 광복하기까지는 제사도 하지 말 것 등을 유언하고서 서기 1917년 정사년 음력 2월 초 9일 바람찬 만리 이역에서 눈 못 감은 천추의 원혼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된 오늘이외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 서 돌아와 우리의 위로 웃고 받으옵소서. 1971년 3월 1일 이은상 짓고 이범석 비명, 이상복 비문 쓰고, 보재 이상설 선생 유족 보 존 위원회 세우다

 

이상설 유허비문(李相卨 遺墟碑文)

<원문> 大韓帝國 高宗皇帝 卽位七年庚午季冬七日 先生嶽降于湖西常山郡德山面山尺里山直村儀 表非凡 局量弘達 常懷憂國憂民志士 出仕台閣 聖皇器重之 乙巳政變 獨拒韓日保護條約 丙 午四月 奉聖皇密詔 丁未五月 出發海牙 冬年六月十五日 與李儁先生 同參於萬國平和會議 以日帝許計 事業未成 儁公憂鬱成病 逝于海牙 厥後孑孒漂泊歐美諸國 與有志多士 謀策光 復祖國 未完初志 丁巳二月九日 病卒于露國 檀紀四二九〇年八月 十八日 建立

 

이상설 유허비문 번역본 - 대한제국 고종황제 즉위 7년(1870) 경오년 12월 7일 선생은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몸가짐 태도가 뛰어나시고 너그러운 도량이 대단히 크시고 나라 걱 정 국민사랑에 항상 뜻을 품으셨으며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벼슬을 하셨다. 임금께서는 선생의 사람됨을 중히 여기셨다. 한일을사보호조약에 홀로 저항하셨고 병오 년(1906) 4월에 고종황제의 밀약을 받고 정미년(1907) 5월에 해아로 출발하여 동년 6월 15일에 이준과 함께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했으나 일제의 간계로 이루지 못하고 이 중공은 울화병으로 해아에서 돌아가셨으나 자손이 없고 공께서는 구미 여러 나라들을 돌 아다니며 뜻있는 많은 인사들과 조국광복을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정사년(1917) 2월 9일 러시아에서 병사하였다. 檀紀四二九〇年八月 十八日 建立

 

진천 이상설 생가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이상설의 생가는 붕괴되어 1988년 복원하였고, 1998년 고증을 통해 본채와 헛간채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 수리하였다. 전체적인 배치는 정남향한 본채와 마당 그리고 건너편에 헛간채로 이루어지고, 본채의 왼쪽 후면에 장독대가 설치되어 있다. 헛간채에 면해서 본채와 마당을 둘러싸고 나무울을 설치하고 헛간채 옆 남쪽에 사립문을 설치하고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진 초가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칸에 안방이 있고 왼쪽에 부엌과 오른쪽에 반 칸 크기로 토광이 전면으로 돌출된 웃방을 두고 있다. 안방 전면 툇간에는 흙바닥으로 된 봉당이 있고, 방 앞에는 디딤돌이 있다. 부엌은 몸채보다 반 칸 돌출하여 설치되고 거적을 달아 문 역할을 하고 있다. 부엌에는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설치하였다. 안방과 웃방 사이에는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서로 연결되고 있다. 웃방 앞의 토광은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구조는 자연석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우고 있다. 벽체는 흙벽돌을 쌓은 후 진흙으로 마감한 토담집이다. 가구는 3량가이고 지붕은 초가이다. 초가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추위와 더위를 막는 농경사회에서 최적화된 주거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마당 건너편의 헛간채는 측간과 잿간,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본채와 같은 형식의 토담집이다. 측간과 잿간에는 거적문을 설치하고 있다.
진천 이상설 생가는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상설 선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으로 의의가 있으며 생가는 토담집으로 지역적이고 민속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