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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연풍면에 있는 연풍성지입니다. 연풍순교성지홈페이지 연풍순교성지천주교 청주교구 및 산하기관ypshrine.com 자연석에 연풍성지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옆에는 형구돌이 서있습니다. 천주교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 15년(1791) 신해교난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여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 이윤일, 김병숙, 김말당, 김마루 등이 순조 1년(1801) 신유교난 때 처형당한 자리로, 1974년부터 천주교회에서 성역화한 곳입니다. 다섯성인상과 반석입니다. 한국인으론 첫 대주교를 지낸 노기남 바오르 대주교의 조각상입니다. 노기남(1902~1984) 바오로 대주교는 생전에 생명 존중을 위한 생명운동에 앞장선 한국천주교 최초의 한국인 주교 입니다. 연풍의 병방골(장연면 방곡리)는 황석두 루카(1813~1866년)..

남이면 산막리 마을회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김기수,이주희 공적비 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김기수,이주희공적비(金基壽,李周熙功績碑)라고 적혀 있으며 후면에는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적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동민의 숙원사업이었던 갈월리에서 산막리까지 진입로 공사추진에 김기수,이주희 두분이 불원가사(不願家事)하고 본 부락 발전을 위하여 헌신봉사 하셨으며 그 공로가 지대하여 이 공적비를 세웁니다.1996년 1월 산막리동민일동이 세웁니다. 산막리는 본래 청주군 남차이면 지역으로써 산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산막골 또는 산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용리를 병합하여 산막리라 해서 남이면에 편입되었다. 전원주택등이 많이 개발되었으며 한적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산촌입니다..

미암리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彌巖里寺址 石造觀音菩薩立 像)은 증평 시가지에서 보강천을 건너 서북쪽으로 약 2㎞쯤 떨어진 미암1리 미륵댕이 마을의 미륵사라는 전통사찰 경내의 300여년 된 느티나무 아래 있으며,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 調査資料)』에는 증평면 미암리마을에 있는데 높이 8척 5촌이 고, 어깨의 폭은 2척, 머리부의 길이는 2척 3촌의 석불로 완전 하다고 했다.이 불상은 높이 2.6m로 얼굴이 넓으며, 머리에는 화불을 양각한 보관(寶冠)을 쓰고, 이마의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고, 목 부분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다. 법의(法衣) 는 통견(通肩)으로 양팔에 걸쳐 배 아래로 흘러내려 활모양의 주름을 어깨에 걸쳐 옆으로 내려졌고, 연꽃..

증평의 지나온 시간들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습니다.선사시대에서 근래에 지금까지 증평의 시대별 여역과 함께 자료들을 담아 보았습니다.증평의 향토자료실 사진입니다.

청안면 문방리 독립지사신강면기적비(淸安面 文芳里 獨立志士辛康勉紀蹟碑) 청안면 문방리 독립지사신강면기적비(淸安面 文芳里 獨立志士辛康勉紀蹟碑)신강면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청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충청북도 괴산(槐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박내king6113.tistory.com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연풍성지의 십자가의 길 14처의 형상물입니다.1-9처는 살아있는 삶의 여정을 나타낸 것이며 10-14처는 죽음의 여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1처 - 선고를 받으심. 2처 - 십자가를 지심. 3처 - 첫번째로 넘어지심. 4처 - 생모 마리아를 만나심. 5처 - 형제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져줌. 6처 - 동생 베로니카가 얼굴을 닦아줌. 7처 - 두번째로 넘어지심. 8처 - 부인들을 위로하심. 9처 - 세번째로 넘어지심. 10처 - 옷 벗김을 당하심. 11처 - 십자가에 못 박히심. 12처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13처 -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14처 - 무덤에 묻히심.

청안면에 위치한 신경행 운수정 유허비를 찾아 보았다.먼젓번 다년온 글로 내용은 대신 해본다. 청안면 문방리 신경행운수정유허비(淸安面 文芳里 辛景行雲水亭遺墟碑) 청안면 문방리 신경행운수정유허비(淸安面 文芳里 辛景行雲水亭遺墟碑)운수정과 관련된 인물은 신경행이다. 신경행(辛景行: 1547∼1618)은 본관이 영산(靈山)이다. 자는 백도(伯道)고, 호는 조은(釣隱)이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조선 선조 6년(1573) 사마시에 합king6113.tistory.com 기존의 운수정 유허비 2점이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유희원(柳希源)의 정려각이다.유희원(柳希源)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라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고, 부모가 노환으로 병석이 눕자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하였다. 또한 엄동설한에도 앙천기도(仰天祈禱)하여 잉어를 구해 봉양하였다. 하지만 유희원(柳希源)을 모함하는 자들이 그가 불효막심하다고 관청에 거짓을 고하였다. 때마침 지나던 암행어사가 그의 집을 몰래 살피니 그가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께 그 사실을 고하여 정려되었다.진천군청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문화로를 따라 화랑관을 지나 진천상업고등학교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원덕로 107번 길을 타고 원덕로 로터리를 끼고 직진하면 약 200m 지나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