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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내고장풍경화둘러보기/향수고장 옥천군 (1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고당리는 옛 기록이 없어 그 연혁을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란 때 유(劉)씨(유득송)가 처음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울창한 송림 속에 함지박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말만 전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할 때 고당리라 하여 옥천군 청남면에 속해 있다가, 1929년 청성면이 생기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당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서 한 마을로 이름 지으면서 고현(高峴)의 고(高)자와 원당(元堂)의 당(堂)자를 한자씩 취하여 고당리라 하였다. 고현(高峴)은 “높은베루”를 한자로 쓰면서 높을 고(高), 고개 현(峴),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고현이라 하였는데 원뜻은 “벼루”란 옛말로 “벼랑” “언덕”이란 말이 되므로 “높은 벼랑”이란 뜻이다. 이곳 지형을 볼 때 “높은 벼랑..
도율리는 도촌(道村)과 율티(栗峙)가 합하여진 마을로서 옛기록에 이 마을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때 도가실과 밤티를 합하여 도율리라 이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말 현재 도촌에 55호 138명, 율티에 37호 67명이 살고 있다. 도율리라 이름 짓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치면서 도촌마을의 도(道)자와 율티의 율(栗)자를 한자씩 취하여 도율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촌은 원래 “도가실”을 한자화할 때 발음대로 “도”를 길도(道)로, “실”을 마을촌(村)으로 사용하여 도촌(道村)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옥천~보은의 옛길은 이곳을 지나 월외~장선~동정~회인(보은)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쉬어가거나 물건을 받아가는 도가(都家)가 있어 이 마을을 도가실이..
화학리는 화일리(禾日里)와 학촌리(鶴村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화일리라 하여 74호가 1891년 기록에는 화일리에 22호, 학촌리에 29호 등으로 분구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일과 학촌이 합하여 화학리(禾鶴里)가 되었다. 1981년 엽송골, 마느실, 학촌이 화학1리로 수일이 화학2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일(禾日)리는 수일(壽逸)이라고도 하는데 나이가 많은 고령자가 많기 때문에 수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벼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화일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분명치 않다. 화일리는 1972년부터 마을원로회의를 구성하고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실행을 위해 온 마을이 단합하는 모범을 보여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오는..
삼남리는 청성면 남부 중앙에 위치한 고지대 마을로 남쪽 방면에서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 요지이다. 면적은 4.99㎢, 인구는 109명이다. 동쪽은 영동군 용산면과 소서리, 서쪽은 양저리와 묘금리, 남쪽은 조천리, 북쪽은 장수리와 궁촌리와 인접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여지도서』 기록에 청산현 남면 조분리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때 청산 군남면 조분리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을 옥천군에 통합시키고 삼거동三巨洞과 차남리車南里를 합쳐 처음 삼남리三南里를 신설하고 옥천군 청남면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하였다. 삼남리는 삼거리와 차남리를 합할 때 삼거리의 석 삼三 자와 차남리의 남녘 남南 자를 한 자씩 따서 삼남리라고 하였다. [주요지명] - ..
방하목리는 안내면 북부에 위치한 산촌마을이다. 동쪽으로 북대리, 남쪽은 서대리, 서쪽은 월외리, 북쪽은 6번 군도와 보은군 수한면 질신리가 연결된다. 면적은 3.29㎢이다. 옥천군 최북단의 두메산골 마을이다. 보은군 수한면 질신리와 월경마을이 경계를 이룬다. 방하목리는 1830년대 발행된 『옥천읍지』에 안내면 관할이며 옥천 관문에서 동쪽으로 거리가 40리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방하목리라 부른다. 방하목리는 옥천군 최북단 오지마을로 예부터 피난지였다. 두 개의 하천이 이 마을 앞에서 하나로 합쳐 흐르는 모양이 디딜방아처럼 생겨 한자음인 방하목리方下目里로 음차하여 부르게 되었다. 행정리로는 방하목리 하나이며, 자연마을은 정구지밭골, 서낭재, 북쪽에는 보은과 경계지인 월경마을, 방하목 등 4개 ..
용촌리는 산촌마을로 의병장 조헌 이 임진왜란 때 후율정사를 짓고 호국의 의지를 닦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면적은 3.86㎢이다. 안내면에서 북서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월외리, 남쪽은 도율리와 답양리, 서쪽은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 북쪽은 보은군 회남면 노성리와 인접한다. 가산천이 북쪽에서 새터말, 용수말, 솔맥이를 거쳐 서쪽 답양리로 흐른다. 용촌리는 조선 후기 『여지도서』에 의하면 가산리佳山里에 속하였던 마을이다. 1830년대 『옥천읍지』에서는 옥천 관문에서 3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 하였고, 1891년 『신묘장적』에도 가산리에 속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산리를 용촌리와 답양리의 2개 리로 분리하여 용촌리가 처음 신설되었다. 용촌리를 흐르는 가산천에 깊은 용소龍沼가 있어 그에 연유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