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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南下里寺址 磨崖佛像群)은 증평읍 남하3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동향해 자리잡은‘탑동 마을’서편의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삼존불(三尊佛)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형식을 비롯해 여래입상(如來立像)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불상군(佛像群)이다. 화강암벽의 3면에 모두 다섯 구(軀)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 본존불(本尊佛)과 좌우 협시불(脇侍佛)의 삼존불을 두 고 왼쪽에 여래입상(如來立像), 오른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배치돼 있다. 이곳 다섯 구의 마애불상 모두 원만자비형(圓滿慈悲形)의 상호(相好)와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 불상군은 전체적인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

증평읍 남하리에 위치한 남하리사지에 있는 돌확입니다. 남하리사지에 있는 삼층석탑의 기단으로 사용되는 자연암반 끝자락에 인공으로 만든 돌절구입니다. 이 곳에 자리하고 있던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0년에 찾아보고 다시 발걸음을 하니여긴가 저긴가?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찾으니 부대시설등이 많이 구비되어 있고 참 좋다.주차장에 있는 화장실 문이라도 개방하여 놓는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혼자만의 생각. 물론 관리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말이다. 경녕군 신도비(敬寧君神道碑)는 방구모랭이에서 안음골로 들어오다 보면 바로 길가에 있다.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가운데 세웠다. 기단부는 하대석에 용을 조각하였고,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받친 위에 연꽃을 조각 비신(碑身)받침 위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신은 사면의 너비가 같은 사각형으로 사면에 글씨를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경녕군신도비’라고 비명을 쓰고 왼쪽면부터 비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주차장과 화장실 등 부대시설도 깔끔하..

증평읍 남하리 증평민속체험관옆에 자리하고 있는 석조불 중 석조불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있는 석불입니다.증평읍 남하2리 미륵마을에 있는 석조불입니다. 불두가 훼손되어 후대에 보수하였으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습니다.자연석 대좌위에 세워져 있으며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석조불의 원래 위치는 알수 없지만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웃골’에 있는 성주사라는 절에 있던 석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지금도 웃골에는 절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절터’는 ‘절’과 ‘터’로 나뉘며, ‘절이 있는 터’로 풀이됩니다. 6ㆍ25 전쟁 전에 ‘성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증평읍 남하리 증평민속체험관옆에 자리하고 있는 석조불 중 가운데 석불입니다.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불두 등을 후대에 보수하였는데 전문적인 솜씨가 아닌 듯 조금은 조악해 보입니다. 두 구의 작은 불상들은 현재의 위치가 본래의 자리였는지 알 수 없으며, 얼굴 등에 시멘트가 덧붙여 있는 등 원형이 훼손돼 있습니다. 작은 불상들은 1949년 속리산 법주사의 윤월인(尹月印)스님이 이 마을 뒤편 골짜기에 성주사(聖住寺)라는 절을 짓고, 마을주민들의 협조로 쓰러진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 불상들을 마을의 수호불(守護佛)로 보호하고 불공을 드리고 있으며, ‘미륵마을’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