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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선녀바위[仙岩里] 북이면 선암리에서 북쪽 방향 500m 즈음에 평탄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틈에서 물 이 흘러 옹달샘을 이루고 있는데, 이 바위를 ‘꼭기할미바위’ 혹은 ‘선녀바위’라고 한다. 옛날, 의원 한 명이 계곡의 바위 그늘에서 피곤한 몸을 잠시 의탁하고 있었다. 아침 나절 환자가 죽어간다는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갔으나 끝내 살리지 못한 터였다. 스물을 갓 넘은 젊은이였고 병도 대단하지 않았는데 구명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도 의 원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의원은 뻔히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살리지 못 한 스스로의 무능이 한스러웠다. 그는 돈만을 중시하는 항간의 의원들과는 판이했다. 빈부지천을 가리지 않고 병만 을 치료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꼈..

이월면 사곡리에 있는 조선중기의 효자 이집(李輯)의 묘소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을 갖추었으며, 봉분 왼쪽에 대형 묘갈을 세웠다.이집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부모가 병으로 누워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을 짐작하고 밤에는 밖에 나가 하늘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3년상을 치르면서 날마다 죽만 먹고 슬프게 哭하였다고 한다. 1717년(숙종43)군내 유림들의 천거로 3년 뒤인 1720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영조1)에 효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이집 묘갈은 방형대좌 위에 높이 143cm, 너비 61cm, 두께 27cm의 오석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는데, 가첨석의 상단부에 여러 마리..

이경선은 1598(선조33)~1636(인조14)조선 중기 의병장입니다. 이경선(李慶善)은 경주인이며 이시발(李時發)의 아들로 1611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그는 23세 때 과거에 급제한 천재로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현감은 지금의 군수)으로 있었을 때다.1636년 12월 14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적병이 서울에 침입하였다. 당시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셨다. 이 때 이경선(李慶善)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근왕병(勤王兵-의병과 같은 군사) 2,432명을 인솔하고, 밤길을 걸으면서 수원산성까지 갔다. 그 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남한산성의 소식을 듣고 있다가 다시 수원 만의산(万義山)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김덕숭의 효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효행으로 1448년(세종 30) 명정되었고, 1633년(인조 11)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김덕숭은 부모를 공양하는데 정성을 다해 세종 행차 때 그 효행 사실을 듣고 술과 고기를 내리고, 감사를 통해 백미를 내리도록 하였다. 그의 사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고 어제시를 3수 내렸다.그의 효행 사실은 『동국신속사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려있다.김덕숭의 묘소는 문백면 평산리에 있다. 묘소 입구에는 1928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谷里 金德崇孝子門)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谷里 金德崇孝子門)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미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강릉인 김덕숭의 효자문입니다.효자문 ..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미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강릉인 김덕숭의 효자문입니다.효자문 옆에는 김덕숭의 아버지인 김천익(金天益)의 비석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효자 김덕숭(金德崇, 1373∼144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 11)에 세운 효자각이다.세종이 눈병 치료를 위해 초정에 들렸을 때, 그의 효행을 듣고 충청감사를 통해 백미(白米) 10석(石)을 내렸다. 이에 김덕숭이 아버지를 모시고 세종을 찾아 인사를 드렸는데 세종은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아들인지 몰랐다고 한다. 1448년(세종 30)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이조참의에 증직(贈職)하고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리면서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그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있다. 김덕숭은 대흥군수를 버리고 고향으..

문백면 평산리 강릉인 김덕숭의 묘지에 같이 합장되어 있는 정부인 양성이씨의 하녀의 무덤입니다.묘표의 정면에는 증정부인양성이씨하녀이인묘( 贈貞夫人陽城李氏下女二人墓)라고 적혀 있습니다.비석의 후면에는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 대막거리에서 이장(移葬)하였으며 이장(移葬)의 주체는 강릉김씨 재학공파 두촌종중 회장 기상이며. 이장(移葬) 시기는 서기 2023년 4월 9일에 세움.입니다. 양성이씨의 추모비가 김덕숭의 묘비 옆에 나란히 서있습니다. 충북에는 몇 기없는 하인들의 무덤입니다.충북에는 약 4기정도의 하인들의 무덤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