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도 차츰 차츰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도안초등학교를 바라보며 오른쪽에 이 학교 출신인 연제근상사의 흉상이 서있다.



2000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 전화가 왔다. 내 큰 형님 고(故) 연제근 상사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고 했다.

11살 아래였던 나를 유난히 귀여워했던 형님이다.

8남매 중 장남이었던 형님은 남자답고 의젓했다. 16살 되던 해 이웃 마을 처녀와 결혼했고, 2년 뒤 "나라를 지키겠다"며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했다. 6개월에 한두 번씩 휴가를 나올 때면 "제은이, 공부 열심히 해야지"하며 운동화랑 학용품을 잔뜩 사줬다. 1949년 10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 공비 9명을 생포한 형님이 특별 휴가를 나왔다. 형님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이 형님이 영웅 됐다"고 외쳤다. 부모님은 그날 잔칫상을 차렸고, 그것이 형님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가 됐다.

전쟁이 터지고 두 달이 채 못 돼 인민군이 포항까지 내려왔다. 형님은 국군 3사단 22연대 분대장으로
포항 장흥동에 배치돼 있었다. 9월 17일 새벽 형님은 '형산강 도하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선발대로 자원해 분대원 12명을 이끌고 가슴까지 물이 차는 형산강을 건넜다. 잠수해 기어가다 숨이 차면 머리를 내밀었고 그때마다 적 기관총이 불을 내뿜었다. 분대원 중 9명이 붉은 피를 토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형님은 끝까지 강을 건너 준비해온 수류탄을 적 기관총 진지에 던졌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적의 진지는 박살이 났다. 형님은 수류탄 두 개를 더 던진 뒤 가슴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형 나이 스물넷이었다. 형의 목숨 건 투혼으로 아군은 쉽게 강을 건넜고, 이튿날 포항을 탈환했다.

 

형님은 이 공로로 훈장 두 개와 무공포장을 받았지만 우리 가족 가슴엔 깊은 상처가 남았다. 형님의 사망통지서를 보고 충격을 받은 형수는 그해 겨울부터 돌도 채 지나지 않은 둘째 딸에게 젖을 먹이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전염병에 걸린 첫째 딸과 영양실조를 앓아오던 둘째 딸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후 형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어머니는 매일 밤 논둑으로 나가 우셨다.

지난 2001년에는 형님 모교인
충북 증평군 도안초등학교에 형의 동상도 세워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을 기억하는데, 하늘에 계신 형님은 그걸 알고 계실까? [ 연제근상사님의 동생분의 싸이월드의 글을 옮겨왔다]



연제근상사가 전사한 형산강전투는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 제5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포항 인근까지 침공해왔다. 국군 제3사단은 영덕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다. 하지만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북서부의 기계면()까지 내려오면서 국군 제3사단은 앞뒤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8월 11일 포항은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국군 제3사단은 영덕군장사리일대에 고립되었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8월 15일 민기식 대령이 지휘하는 민부대(제7사단)를 포항 탈환 작전에 투입했고, 민부대는 미군의 함포 지원을 받아 8월 18일 포항 시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민부대로부터 임무를 넘겨받아 다시 포항 전선에 투입된 제3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포항 북부의 흥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국군은 9월 5일 포항에서 철수해 형산강 남안 지역에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군은 형산강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 했으나 9월 6일 북한군은 형산강을 건너 중단리 일대까지 진출해왔고, 9월 7일에는 운제산(482m) 일대까지 내려왔다. 후속 부대들도 잇따라 형산강을 건너오면서 옥녀봉 일대는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형산강 방어선이 뚫리자 국군 제3사단은 9월 8일 저녁에 장동리 일대로 물러나서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동산리에 집결해 있던 국군 수도사단의 제18연대도 이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운제산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운제산-무장산-포함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를 따라 북한군이 경주로 침투하기가 용이해졌다. 이에 국군과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 계획을 세웠는데, 미 제24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가 운제산의 북한군을 공격하고, 국군이 옥녀봉 등 주변 지역의 퇴로를 차단하며 협공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9월 11일 미군은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운제산을 공격했고, 국군도 옥녀봉 일대의 북한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9월 12일 북한군이 패해 물러나면서 국군은 운제산과 옥녀봉 일대의 방어진지를 탈환하였고, 9월 14일에는 북한군이 형산강 북안으로 모두 물러났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국군 제3사단도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형산강 도하작전을 추진했다. 9월 16일 밤부터 국군 제3사단은 형산강을 건너기 위해 북한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도하에 실패했다. 그러자 국군은 결사대를 편성했는데, 제22연대 제1대대 소속의 연제근() 상사는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서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전사했다. 이러한 결사대의 활약으로 도하의 교두보를 확보한 국군은 9월 19일 형산강을 건너 진격해 9월 20일 포항을 탈환했다.

형산강 전투는 2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포항까지 남하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할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현재 포항시 남구 해도공원에는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인 연제근 상사와 12인 특공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인 연제근 상사와 12인 특공대를 기리는 동상


도안면 평화공원에 조성된 연제근상사의 동상입니다.




 

 

청주사람들에게는 효자문거리 하면 귀에 익은 곳이다.

충신,효자 연최족의 정려문이 있어 이 곳을 효자문 거리라 불리우고 있다.

연공충효양전문(延公忠孝全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안에는 충신,효자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에는 충신효자 유명조선증이조판서행사헌부감찰연최적지문(忠臣孝子 有名朝鮮贈吏曹判書行司憲府監察延最績之門)이라고 적혀있다.

 

 

 

연최적(延最績: 1662∼1693)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시호는 의민(毅愍),본관은 곡산이다. 현종 3년(1662)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택로(宅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門人)이다. 숙종 8년(1682) 20세의 나이로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후 감찰(監察)이 됐으나 정국의 변화로 관직을 물러나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후에 다시 관직으로 나갔으나 숙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사람들의 용서를 상소했다가 도리어 화를 입어 숙종 19년(1693)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西人)이 집권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됐다.
숙종 21년(1695) 순무사 송광연(宋光淵)이 지방을 순시할 때, 이 지역의 선비 수십명이 지난날 그의 효행과 행적을 알려 정려문이 내려졌다.

그후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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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을 지나 충주로 가는 도로를 지나다 보면 도안 못미쳐 만나는 곳이 울어바위라고 불리우는 명암마을이다.

증평군지에 의하면 명암마을은 법정동으로는 화성7리에 속한다.

 

화성7리(花城七里) : ,행화촌(杏花村) : 오늘날 화성5리를 이루는 ‘북촌’, 화성6리를 이루는 ‘남촌’, 그리고 화성7리를 이루는 ‘행화촌’은 본래 ‘명암(鳴岩)’,‘울어바우’,‘우레바우’,‘우레바위’,‘우르배’로 불리던 마을이다. ‘행화촌’은 ‘북촌’의 남서쪽에 있다. ‘행화촌(杏花村)’은 ‘행화, 즉 살구꽃이 많은 마을’로 풀이된다. 진모랭이 : ‘남촌’에서 증평으로 가는 길에 있는 긴 모퉁이이다. 과거 ‘명암’ 사람들은 이 모퉁이를 통해서 증평장을 보러 다녔다. ‘진모랭이’는 ‘긴모퉁이’의 충청방언형이다. 집너머들 : ‘명암’ 앞 36번국도와 보강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집너머들’은 ‘집너머’와 ‘들’로, ‘집너머’는 ‘집’과 ‘너머’로 나뉜다. ‘너머’는 동사 어간 ‘넘[越]’에 파생접사 ‘어’가 붙어 이루어진 말로, ‘집,담,산,고개 같은 높은 것의 저쪽’이란 뜻을 지닌다. 동사 어간에 파생접사가 붙어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예는 매우 흔하다. 예컨대, ‘너미’,‘배기’ 등은 각각 ‘넘다’,‘박다’의 어간 ‘넘’,‘박’에 ‘이’가 붙는 경우요, ‘내기’는 ‘나다[出]’의 어간 ‘나’에 ‘기’가 붙는 경우이다. ‘너머’계 지명은, ‘길게너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재’,‘집’,‘당’,‘동산’,‘태봉’,‘성황’ 등 구체적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전부요소(前部要所)로 쓰인다. ‘집너머’는 골,들,마을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사용되는데, ‘집너매’,‘집너메’,‘집너머말’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집너머들’은 ‘집 너머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곡산연씨세거지비(谷山延氏世居之碑)가 세워져 있다.세거지비에는 곡산연씨의 유래에 대하여 기술하여 놓았다.

 

 

 

 

 

 

 

 

 

 

 

 

 

 

 

 

 

 

 

 

 

 

 

 

 

 

 

 

 

 

 


상주공파의 파조이시다.벼슬은 흡곡현령을 지내셨으며, 병술년에 태어났다.숙천부사와 통정대부행상주목사겸상주진관병마절제사(通政大夫行上州牧使兼上州鎭管兵馬節制使)를 역임하셨다.숙천부사로 재임하실 때(공이) 정사를 간략히 하고 부역을 공평하게 한다는 것을 세조가 듣고 포상하였다.

성종 을미년 3월 7일에 돌아가셨고 묘는 위(부친이신 정후공)와 같이 도봉구 하계동 상곡에 간좌로 모셨으며 표석이 있다.

지금은 증평 울어바위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1965년에 건립하였다.



















도안읍 화성리 명암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곡산연문의 묘역입니다.




연사종묘표(延嗣宗墓表)와 신도비(神道碑) : 정후공 연사종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평원일대의 곡산연씨 묘역에 있었다. 1990년 9월 17일에 도안면 화성리 ‘명암’ 뒤쪽에 있는 주실산의 곡산연씨 묘역으로 이장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묘비 또한 묘소를 이장하면서 함께 옮겨와, 묘소 앞에 세웠다. 비문은 영조 30년(1754)에 외손 민우수(閔愚洙)가 지었고, 글씨는 송명흠(宋明欽)이 썼다. 신도비는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황희(黃喜)가 찬(撰)한 1440년의 비문을 1959년에 후손인 연종혁(延鍾赫),연명일(延明一),연규영(延圭瑛)의 노력으로 다시 세웠다.


연음묘표(延陰墓表)와 신도비(神道碑) : 회양부사(淮陽府使) 연음(延陰: 1418~1452)의 묘소는 연사종의 묘소 바로 아래 그의 둘째 형인 연비(延庇)의 묘소 옆에 있다. 이 또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에서 1973년에 이장한 것이고, 그의 형 묘소는 1990년에 이장한 것이다. 연음의 묘표는 정조 3년(1779)에 10대손 연동헌(延東憲)이 쓴 것이다. 또한 1973년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후손인 연규복(延圭復)이 짓고 썼다.














 

연음(延蔭)은 1438년(세종 20년) 연사종의 차남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회양공(淮陽公)으로 문중에 알려진 그는 통훈대부회양도호부사겸 동진영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였으며 향년 35세로 단명하였다.

35세의 젊은나이로 단명하였으나 문중의 최대파속으로 현재 곡산연씨 문중의 약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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