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굴리는 보은읍의 남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월송리,서쪽은 지산리,남쪽은 삼승면,북쪽은 수정・월송리에 접하고 있다. 본래 보은군 서니면지역으로 고려시대에  금을 많이캤다 하여 쇠푸니,또는 금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따라 은사리와 구량리를 병합하여 금굴리라 하고 보은읍에 편입되었다.  금굴리는 은사뜰, 쇠푸니, 새터, 구랭이등 자연마을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있다. 1960년 은사뜰과 쇠푸니를 금굴1리로,구랭이와 새터를 금굴2리로 분구하였다

 

 

 

구랭이는 원래 아홉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다  투기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간다는 뜻의 구량리(九良里)가 변한 지명이다.  지금은 청주~상주간고속도로의 보은인터체인지와 확장된 19번국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몇 년전만 해도구랭이는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삼승면 둔덕리부터  탄부면 매화리까지 탁 트인 들판을조망할 수 있었다 예로 부터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주민들에게 물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마을사람들은 둔덕리 소재의 농경지 1만평을 매입해 너나 없이 힘을 보태 손수 저수지(동문지)를 만들었다. 1900년 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 마을책임자 였던 박일호,박원근씨는 저수지를 개척하는데 앞장서고,농경지 4,000평과 임야 2만7,000평을 마을기금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중 임야7,000평이 청주~상주간  고속도로에 편입되었다. 1993년 주민들은 마을입구에 밀양인 박일호,박원근씨의 업적을  기리는공적비를 세웠다

 

박원근,박일호의 공적비입니다.



수현마을의 옛이름은 닦은 터이다. 혹은 신당이 있어서 당끝터라고도 부른다.

산과 고개를 닦아서 사람들이 왕래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어졌으며 매산이나 괴산사람들이 반드시 수현을 거쳐야 충주로 갈수 있었다.

닦은 터를 일제강점기때 한자로 옮기면서 수현(修峴)마을이 되었다.




수현마을은 매현리에서 터골 웃말 아랫말을 일컫는다.도로포장,특히 농로포장이 잘되어있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다.

마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박씨의 재실이다.블럭담을 두르고 있으며 관리상태는 양호하다.



수현리 박씨문중은 박돈홍의 10대조 이정공(夷靖公) 박열(朴說)이 성종조 청백리로 그 때 하사받은 어서(御書) 청백전가(淸白傳家)를 종훈(宗訓)으로 하고 마을에 재실 영모재를 건립하여 한식과 9월중양제 10월 세일사(歲一祀) 다례제를 지낸다.

1930-40년대 입향조 돈홍의 7세손 영자(泳字)항렬 남자 40여호에 이르러 박씨문중이 전성기를 누렸으며 현재 충주시관내 거주 20세대 향촌 수현 거주 3세대 충주출향 40여 세대에 이르고 있다.

현재 입향조의 5세인 박기태(朴基台)씨가 종손이며 7세 박영택(朴泳澤)씨가 문장으로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민함의 신도비이다.


민함(閔涵)은 여흥민씨 판서공파 파조(派祖)이다. 아들은 민응건이다. 민함은 무관으로서 1679년(숙종 5)의 내승(內乘) 민함이 정주목사가 되었고, 1700년(숙종 26) 통제사로 역임 중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행실이 좋지 않다고 탄핵을 당했으나, 다행히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708년(숙종 34) 병사로 재임 중에 나이가 많고 쇠약한데다 병든 상태였다. 민함에 대하여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대체로 현종·숙종은 신임하지만 관료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지 않았던듯 하다. 증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工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추증받았다.


1994년 여흥민씨 송곡종친회(松谷宗親會)에서 건립하였다. 민함의 후손 동천 민창기(閔昌基)가 찬하고 예석(蘂石) 민찬식(閔燦植)이 글씨를 썼다.

충주에서 국도 19호선을 이용하여 목계를 지난 후 소태 방향의 지방도 599호선으로 좌회전하여 500m 정도 가면 양촌리 송곡마을이 나오는데, 민함 신도비는 이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옆쪽에 자리하고 있다.비석을 바라보며 맨 왼쪽에 자리한 비석이다


비좌개석의 형태로 지붕돌과 대석은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이다. 지붕돌의 규모는 104.5×63.5×73㎝이며, 비신은 59×29×174㎝이다. 대석은 2단으로 제작하였는데, 상단 84×55×6㎝, 하단 102.5×72×35㎝의 규모를 보이고 있다..


제액은 8×12㎝ 크기의 전서(篆書)로 비신의 상단에 ‘여흥민씨판서공신도비(驪興閔氏判書公神道碑)’라고 앞면과 뒷면에 5자씩 쓰여 있으며, 비제 없이 2×3㎝의 국한문 혼용체로 본문을 음기하고 있다.


소태면 양촌리 송곡마을에 있는 영모재 옆 공터에 ‘영중추부사민공신도비(領中樞府事閔公神道碑)’를 세워 민응건(閔應騫)을 기리고 있으며, 그 외 최근에 건립한 ‘여흥후인민영한송덕비(驪興后人閔泳翰頌德碑)’, ‘여흥후인동천민창기송덕비(驪興后人東泉閔昌基頌德碑)’를 세워 송곡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호재(大湖齋)는 현도면 하석1리에 있는 밀양박씨들의 사당이다.

근간에 새로지은 듯 잘 보존되고 있다.씨족사회의 산물이였던 집성촌의 개념이 점점 희미해 지면서 문중의 사당들도 많이 쇠락하는 듯

찾는 사람들도 없는 듯 하다.

 

 

문중의 사당등이 구심점이 되여 잊혀져 가는 조상들의 자취와 효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립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송읍 연제리에 위치하고 있는 모과공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모과나무가 있다하여 모과공원이라 명명하였다.

 

 

 

 

 

 

 

 

 

 

 

 

 

 

 

박우현의 생몰년은 1572년(선조 5)∼1592년(선조 25)이며 조선 중기 의병장이다.

자는 희성(希聖)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출신지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이다.


조부는 오정공(梧亭公) 박란(朴蘭)이고, 부친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박형원(朴亨元)이며,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된 밀천군(密川君) 박숭원(朴崇元)이 숙부이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북상하여 청주(淸州) 지역을 공격할 때에 의병을 모집하여 성에서 맞서 싸웠으나

북문 밖에서 2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1765년(영조 41)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되었다.

 

묘비석에는  조선의사증사헌부지평밀양박공우현묘(朝鮮義士贈司憲府持平密陽朴公友賢墓)라고 음각되여 있다.

묘는 흥덕구 수의동 도장골 안쪽 청룡산 기슭에 있다.

 

 

묘소의 위치는 수의동 도장골 청룡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작은 계곡을 두고 숙부인 박숭원의 묘의 건너편에 있다.

 

 

묘역은 약 100평으로 상석 망주석 등을 갖추었고 묘비는 봉분 좌우측에 각각 1기씩 세웠다. 오른쪽의 묘비는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16㎝, 폭 41㎝, 두께 20㎝의 회색 화강암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은 4면비이다. 묘소 바로 아래에는 “忠奴水鐵之碑”(충노수철지비)가 있다. 높이 93㎝, 폭 34㎝, 두께 10㎝의 묘갈형 오석 화강암 비석으로, 뒷면에는 “月午門宗一同戊辰十日月日刻字 朴南圭”(월오문종일동무진시월일각자박남규)라고 새겼다

 

 

 

 

 

비의 제목은 “朝鮮義士贈司憲府持平密陽朴公佑賢墓 贈淑人天安金氏祔左 戊午四月日建立”(조선의사증사헌부지평밀양박공우현묘 증숙인천안김씨부좌 무오사월일건립) 이며 비문은 9세손 박영진(朴英鎭)이 짓고 이석영이 글씨를 썼다.

왼쪽 묘갈의 전액(篆額)은 “朝鮮義士贈持平密陽朴公 墓碣銘”(조선의사증지평밀양박공 묘갈명)으로 이석영의 글씨이다. 비문은 김덕한이 짓고 정운학이 글씨를 썼으며, 조병천의 추기(追記)가 있다.

추기의 내용은 “舊碣字泐 因多士協力 昭陽協洽 暮春上澣 更竪此石云”(구갈자륵 인다사협력 소양협흡 모춘상한 갱수차석운)이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