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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박물관 구경하기/진주박물관(晋州博物館) (5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에서 발견되어 탑 옆에 세워놓은 설명판에 '함양구양리 삼층석탑(咸陽九楊里 三層石塔)'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박물관 앞 석탑으로도 불리고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라 전할 뿐 유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9-17[남강로 626-35] 국립진주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근래에 제작한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노반을 가진 삼층석탑으로 복원해 놓았으나 원래의 석재로 생각되는 것은 각각 상층기단 갑석과 1층 탑신으로 복원해 놓은 석재와 옥개석 3매 뿐이다. 남아있는 상층..
조선시대 때 경상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였던 관아 영남포정사의 정문.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1895년(고종 32)에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시행됨에 따라 진주부가 설치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자 망미루가 경상남도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 광해군 10년(1610)에 당시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의 동문을 중수하여 대변루(待變樓)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영남 포정사의 전신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목조와가 이층 누각건물로서 한말에 세운 것..
진주성내에 자리하고 있는 우물입니다 옛우물터인 듯 합니다 잘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진양정씨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닌 청계서원은 1961년 이래로 약 20여 년간 봉계서원으로 불렸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강당·고직사(庫直舍) 영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지닌다. 외삼문인 창제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의 강당인 정교당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이 마당의 좌우측에는 비석을 2개 배치하였다. 강당의 좌측은 경덕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강당의 우측은 정면 3칸의 고직사가 있고, 그 뒤로 내삼문인 혜민문(惠民門)을 지나면 다시 정면 3칸의 숭은사라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문에 걸어 놓은 청계서원 현판과 숭은사 현판, 혜민문 현판은 모두 후손인 정창훈이 쓰고 제작하여 걸은 것이다. 이외에도 1961년에 후손 정순석(鄭順錫), 정태호(鄭台鎬), 정재화(鄭載華)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벽돌기단입니다.건축물의 기단부를 벽돌로 쌓은 것으로,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죽죽리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진주성 내 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석 위에 일정 간격으로 높이 15㎝가량의 탱주(撐柱)를 세우고, 그 사이에 벽돌을 쌓은 다음 갑석을 덮었다. 사용된 벽돌은 장방형으로 길이 32㎝, 두께 7㎝ 내외이다. 벽돌은 가로로 눕혀서 쌓고 탱주와 접하는 곳은 반으로 잘라 사용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로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하공진의 사적비.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공진은 자신을 볼모로 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하공진의 이와 같은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69년에 하공진의 후손이 건립하였다. 방형의 대좌와 거북형태의 비좌가 한 돌로 되어 있고 비신 위의 비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방으로는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고려 성종과 현종대의 충절신인 하공진의 사적을 널리 알리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특히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데 하공진의 충절사적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