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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51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속리산 법주사의 자연석에 새겨진 각자입니다.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고 각자 되어 있으며 이끼등이 많이 끼여 옆에 있는 작은 글자는 판독하기가 어렵습니다.최송설당이라는 각자는 속리산에 위치한 복천암의 자연암벽에도 각자 되어 있습니다. 최송설당 - Daum 백과 최송설당일제강점기 전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한 육영사업가. 본관은 화순(和順).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松雪堂)은 호이다. 경상북도 김천 출생. 아버지는 최창환(崔昌煥)이100.daum.net
희견보살상은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10월 7일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앞에 성불(成佛)의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면서 아미타불 앞에 향로공양(香爐供養)하는 보살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나약한 인간에게 영원한 믿음이 내재하도록 백절불굴의 정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대석 위에 큰 그릇 모양의 용기를 머리에 이고 부처 앞에 나아가는 공양불상으로 지대석·신체 부분·용기의 3부분로 되어 있다. 얼굴 부분은 심하게 손상되어 알아보기 어렵고, 신체는 군의(부처나 보살이 입는 치마처럼 생긴 아랫도리 옷) 위에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는데 띠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발은 맨발..
법주사 경내 추래암 마애불의 한쪽면을 장식하고 있는 암각화 입니다.승려가 말등에 물건(불경)을 싣고 가는 그림이 선각이 되어 있습니다. 법주사에 불경을 싣고오는 의선조사를 묘사한 그림이라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의신조사가 인도 천축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도중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합니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전설을 그림으로 하여 이 곳에 선각한 듯 합니다.
법주사 지존국사비가 있는 압벽에 각자되어 있는 홍우룡(洪祐龍)의 이름입니다.홍우룡이 보은군수를 지내던 시절 이 곳 법주사를 찾아서 암벽에 이름을 각자한 것으로 보입니다.홍우룡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보은군수로 재임하였습니다.또한 보은향교 앞에는 향교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의미로 홍우룡의 철비가 1기 자리하고 있습니다.홍우룡옆에 같이 각자되어있는 이희규(李熙奎)는 홍우룡이 보은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의 인물로 한정하여 찾아 보니 상지관을 지낸 이희규의 이름을 승정원일기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희규가 홍우룡과 함께 이곳 속리산을 찾았다가 이름을 각자한 것으로 보입니다. 승정원일기 2996책 (탈초본 137책) 고종 27년 4월 28일 정묘 9/9 기사 1890년 光緖(淸/德宗) 16년〈○〉 庚寅四月二十八日..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보은 법주사 철솥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이다.신라시대 성덕왕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조선시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탄부면 임한리 솔밭에 있는 유홍선생의 시비(詩碑)니다. 하나는 주사 마유명과 주고받은 광국시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친구분의 생신축시입니다. 주사마유명화답광국시( 主事馬維明和答光國詩)입니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황마(黃麻)로 구궐(九闕)을 돌이키게 하니 밝은 해가 나의 작은 정성을 비춰주네 한시(漢市)는 신풍(新風)의 술이요 태성(泰城)에는 세류(細柳)의 진영(陳營)이라. 귀향 길에는 흥이 저절로 나고 구슬같은 곡조로 꾀꼬리는 환송하는 듯 하네 압록강가에 봄이 깊으니 아름다운 경치가 십리(十里)에 환하구나 선군사마동기생신축시( 先君司馬同期生辰祝詩) 가을 국화꽃은 축수의 자리에 빛났고 기쁘고 즐거움이 아름다운 생신에 미치네 옥을 굴리는 듯 맑은 창곡은 흐르고 산이 기울도록 윗분은 취하셨네 의기양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