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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11년(1787) 청주목 산외일면 비홍리(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 비홍마을)에 세워졌다. 도암(道巖) 변익하(卞益夏, 1683∼1717)는 부모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손가락을 잘라( 斷指注血)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으며, 시묘살이 중 음식을 거르며 슬퍼하다가 서른다섯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지금의 효자각은 1968년 중건한 것이며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에 낮은 벽을 쌓은 뒤 홍살로 막고 안에 편액을 걸었다.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에서 관리한다. [卞益夏孝子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효자처사변익하지문(孝子處士卞益夏之門)이라고 각자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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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도원리 태평재 담벼략에 있는 열녀강릉김씨의 비석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열녀유인강릉김씨지비㤠女孺人江陵金氏之碑라고 각인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강릉김씨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효부 강릉김씨(1911-1932)의 효열비로 1932년 도원리에 세웠습니다. 비문은 민영석이 짓고 글씨는 변숭인이 썼다. 강릉김씨는 김계선의 딸로 16세에 성산인 전병화에게 시집을 와 아내의 역할을 다하며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남편이 이름모를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되자 매일 밤마다 목욕하고 하늘에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일을 멈추질 않았다. 또한 한 겨울에도 병에 좋다는 약을 캐어 병수발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그러나 그러한 정성에도 남편이 병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자 강릉김씨는 22세의 나이로 남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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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호는 조선시대의 효자입니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아버지는 곽진은(郭鎭殷)이며,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이다. 효자 곽진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곽원호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대에 걸쳐 효행으로 정려(旌閭)된 효자 집안이다. 여덟 살 때에 묘소 아래 수리(數里)에 걸쳐 소나무와 참나무를 심으니 후에 숲을 이루고 울창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효심에서 한 일이었다.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하찮은 음식과 물건이라도 먼저 드렸다. 또한 부모가 병환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부모님에게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돌아가신 뒤로는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50년 동안 묘소를 지켰으며 90여 세에 여막에서 죽었다. 1852년(철종 3) 조정에 장계가 올라가 1854년에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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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청용리에 위치하고 있는 효자 김종현과 효부 보성오씨의 효행비이다.자손과 마을사람들에 의하여 1991년에 건립되였다. 비석 전면에는 효자김공종현 효부유인보성오씨의 비라고 한글로 음각하였으며 비의 뒷면과 옆면에는 효자 김종현과 효부 보성오씨의 효행과 표창기록등이 음각되여 있다. 김종현은 1883년 생으로 부모에게 끝없는 효행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효의 본보기가 됨으로서 1926년 성균관에서 효행상을 받았으며 1947년에는 청안향교의 전교로 유교발전에 많은 공로를 인정 받았다. 더불어 부인인 보성오씨도 시부모를 극진히 섬김으로 주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부모님이 병환중에 산꿩이 먹고 싶다고 하여 꿩을 잡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잡지를 못하자 기도하니 나락더미에 숨어있던 꿩을 발견하여 봉양할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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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는 1815년 2월 8일 생으로 동지중추부사이신 종구의 큰아들인 희우의 아내이다. 경주이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20세에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신음하니 낮에는 약을 구해 달이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보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7년동안 간호하니 모두들 하늘이 내려준 효부라 칭송하였다. 그러나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가 별세하시니 슬퍼함이 하늘을 울렸고 3년동안 상식을 살아계실때 처럼 받들었다.이 후 30세에는 부군이 병환으로 고생을 하자 온갖 약을 구해 시탕하였으며 생명이 위독할 때는 단지주혈 함으로서 생명을 연장 시키기도 하였다. 천명으로 부군이 별세하니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외아들인 상동이 겨우 6세라 차마 따라 죽지를 못하고 미망인을 자처하며 신고한 삶을 살으셨다. 효열부 김씨부인의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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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처흠은 아버지가 눈병이 있어 약을 써도 오랫동안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흰 매의 눈알을 구해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선처흠이 산에 올라 치성으로 기도하자 한 쌍의 흰 매가 날아와서 잡아 약으로 썼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선처흠의 처 영인 경주김씨의 효열문으로 남편이 고질병으로 고생하자 넓적다리 살을 잘라 먹여 낫게 하였다. 선처흠의 임종 시에는 단지주혈로 손가락을 베어서 나온 피를 먹여 며칠을 더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효자증조산대부동몽교관보성선처흠지문(孝子贈朝散大夫童蒙敎官寶城宣處欽之門) 열녀선처흠처영인경주김씨지문(烈女宣處欽妻令人慶州金氏之門)이란 쓴 정려문과 정려비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