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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54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만추의 후미리고향 다년오던길에 후미리에 들려 석탑과 한참이고 눈맞추고 왔습니다.언제나 제 자리에서 든든히 절터를 지켜주는 후미리 석탑의 모습이 든든합니다. 음성 후미리 석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음성 후미리 석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음성 후미리 석탑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있다. 2001년 12월 7일 음성군의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탑으로 본래 5층탑이었으나, 현재는 기단부(基壇部)ko.wikipedia.org
원남초등학교 뒷쪽 보룡리사지에 위치하고 있는 석불입니다.금박대신 노오란 페인트를 칠해 놓았습니다.보호각의 한쪽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그 덕분에 석불의 뒷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볼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 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원남초등학교 뒷길로 하여 좁은길로 재촉하여 걷다보면 만날수 있는 석불좌상입니다. 차량통행등은 조금 불편합니다.석불좌상을 모신 보호각도 이제는 세월을 입고 많이 쇠락되었습니다. 찾는king6113.tistory.com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비선거리에 있는 조선 숙종때 충주목사인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목사이후국헌청덕애민선정비( 牧使李侯國憲淸德愛民善政碑 )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비석은 일체형으로 비두에는 구름무늬의 모양이 있습니다.음성 디지털문화대전에는 이채청의 비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정정을 하고자 여기저기 연락해 보아도 비지정이다 또는 비석의 위치가 다르다며 영 정정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이국헌의 비석옆에는 이국헌 다음으로 충주목사가 된 엄찬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이국헌의 아들이 엄찬의 곤장을 맞고 죽었으니 두 비석의 주인공들은 서로 원수일텐데 비석은 나란히 서있습니다.그 사연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비석은 말이 없습니다. 이국헌의 비석은 충주를 비롯하여 현재의 지명인 음성과 괴산등..
소이면 비산리 동네에서 미타사쪽으로 길을 재촉하다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두기의 비석을 볼수 있습니다.동시대에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과 이국헌의 비석입니다.예전에는 이 길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마굿간도 있었고 사람이 쉬어갈수 있는 주막도 있었다고 합니다.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니 고을수령등의 선정비도 있었을 거구요 이 비석이 서있는 거리다 하여 지명마저도 비선거리 입니다.비석은 크기에 비해 조금은 조각솜씨가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비산리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옆에는 동 시대의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비석입니다.두 비석의 모습으로 보아 동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비두에는 태극문양등으로 모습을 내었지만 비석의 크기에 비해 글씨등은 조금은 서툰솜씨 입니다.이 비석들로 인하여 이..
음성디지털 문화대전에는 조선시대의 문신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나 제 생각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힘들었던 상당리 주민들을 위하여 세금대납과 식량등을 풀어 주민들을 빈곤에서 구한 상당리에 거주했던 최홍걸의 시혜비정도로 보면 좋을것 같습니다.비석은 상당리 주민들에 의하여 임신년(1932년)에 세워졌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소파거사최홍걸시혜불망비( 少坡居士崔弘杰施惠不忘碑 )라고 적혀있습니다.정억성효자비와 함께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주변의 관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억성은 일제강점기의 효자로서 공부자탄생2479년(1928년)에 음성군 명륜회장으로 부터 포상을 받은 효자입니다.원남면 상당리 옛날 마을초입길에 있습니다. 연일정공휘억성효자비( 延日鄭公諱億成孝子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정억성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억성의 아들 정만수가 일제강점기인 소화16년 (1941년)에 생전의 아버지의 포상내역(1928년)을 기록하여 동네 어귀에 세웠습니다. 효자비 전면에 있는 비석의 건립시기인 소화(昭和)16년인 신사년(辛巳年) 오월에 세웠습니다. 그 후 누군가의 의해 글자가 훼손되었으나 판독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