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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3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북이면 선암리에 위치한 초계변씨묘원입니다.나즈막한 동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연석위에 초계변씨묘원(草溪卞氏墓苑)이라고 적혀 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묘원은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변경복,변충남,변경수등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초계 변씨는 시조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변정실(卞庭實)로 팔계군(八溪君=草溪)에 봉해졌음으로 본관을 초계로 하였다. 중시조는 조선초 직제학을 지낸 변효문(卞孝文)이고, 입향조는 13세손 변충남(卞忠男)으로 장예원 판결사를 지내고, 1570년 경 충 남 직산에서 내수읍 비홍리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이 일대가 세거지가 되었다. 변경복은 조선 전기 청주지역의 효자·학자입니다.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중신(仲申)이며, 호는 백음(栢陰)이다. 청원군 내수읍 비상..

임성순은 공직에 투신하여 북이면 재무게,서무계 주임등을 거쳐 부면장을 역임하고 청백한 공무원으로 면민들의 선망을 받아 1960년에 민선면장(1960.12.27~1961.06.07)으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5.16혁명으로 공직을 사퇴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지역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수리안전답을 조성하고 정부지원을 받아 불당골에 소류지를 신설하였으며 동리에 전기시설을 할수 있는 시설융자등을 얻었다.1978년에는 대청호조절지 위치로 동리가 수몰될 위치로 편입되어 많은 동네 주민들이 불안해 하는 가운데 선생은 각계에 호소하여 제외되기도 하였다. 1980년에 발생한 여름장마 폭우로 인하여 마을의 도로와 마을회관이 유실되자 이듬 해 공의 노력으로 석축으로 제방공..

북이면 선암리 마을초입에 1999년에 세워진 풍천인 죽청 임화순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죽청풍천임공화순공적비( 竹淸豊川任公華淳功績碑)라고 적혀있으며 좌,우,후면에는 임화순의 공적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임화순은 천안에서 3년여 동안 한문수학을 한후 고향인 이 곳 선암리로 돌아와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한문수학을 교육시켰으며 또한 북이면 대길국민학교의 육성회장으로 지역의 교육발전에 기여 하였으며 청주향교 교화 문화부장에 임명되어 유림발전에 기여 하였으며 선암리 경로당 회장도 역임하는 등 충과 효 그리고 교육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습니다.또한 풍천임씨선암종중의 종친회장을 지내며 종중발전에도 기여 하였고 선조인 감역공의 사당을 건립하는 등 공적을 지대하므로 공의 공적을 기리며 그 공적을 잊지않기 위하여..

북이면 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풍청임문가와 관련된 사람들의 효자문과 열녀문입니다.임헌호의 처 문화유씨와 그의 며느리인 임의재의 아내인 철원최씨의 효부문과 임시대의 처 안동김씨,그리고 임기백의 효자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암리는 풍천임씨들의 집성촌입니다. 임헌호 처 문화 유씨(任憲鎬妻 文化柳氏, 1854~1925)문화 유씨는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 1구 풍천임문(豊川任門)으로 시집 온 조선조 효부이다. 통덕랑(通德郞) 임헌호(任憲鎬)의 아내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어머니 병에 꿩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제단을 마련하였다. 밤낮으로 치성을 올린 지 10일 만에 우연히 암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기어 들어왔다. 유씨는 그 꿩을 잡아 시어머니에게 올..

정하동을 지나면 정상동 일명 '돌꼬지' 마을이다. '정상'이란 이름 전에는 머굿대, 그 이전에 부르던 마을 이름이 '돌꼬지'다. 돌꼬지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산모퉁이에 하얀 돌이 도드라져 나와 있는데 그 하얀 돌이 꽃 같다고 해서 붙여졌고 한자로 석화(石花)라고 부른다. 정상, 정하, 정북이란 지명의 유래는 큰 샘을 두고 위·아래·북쪽에 있어 일본 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의 유래가 된 큰 샘은 정상마을 입구에 있다. 샘은 유명세만큼이나 지금도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샘 주변은 누각을 만들어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물을 퍼담던 곳은 대리석으로 6각형 형태를 만들어 깔끔하게 단장됐다. 샘이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가뭄이 오래가도 물이 마르지 않아 식수와 농업용수로 쓰고 남을 정도여서 주..

청원구 외남동 마을길 끝에 접한 야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군범(君範)이며, 호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씨(柳氏)로 유승주(柳承冑)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어머니가 『등왕각서(藤王閣序)』를 말로써 가르치면 한번에 암송하는 재질이 있었다. 8세에 시를 짓기 시작하였고, 또한『상서(尙書)』기삼백(朞三百)의 주(注)를 해석하였다고 한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스승으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동문인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윤혼(尹混) 등과 친교, 학문을 강론하였다. 뛰어난 학행으로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도(道)의 관찰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