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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21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나상악은 면협의회의원과 군평의원을 역임했으며, 비상초등학교가 세워지기까지 개인의 밭을 희사해 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또 사유지 900평을 마을 공동 경작지로 내놓았는가 하면, 유림의 추천으로 청주향교 전교를 지내며 우리 전통을 지켜나가는 일에 힘을 쏟았다. 비상초등학교설립 추진과 더불어 내수중학교 강당 건립을 위해 희사한 나상헌씨는 청주향교 전교와 청주군협의원과 충북협의원에 피선되었다. 또 현직참봉을 지낸 나헌용씨 역시, 부강초등학교 강당건립에 희사해 지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홍양사 앞에는 이들 3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출처 : 충청타임즈(http://www.cctimes.kr)
나헌용은 본관이 안정으로 초휘는 시용(始容), 자는 희도(羲圖), 호는 혜전(蕙田)이다. 그는 1851년 신해 2월 14일 상당현 비홍리 87번지 에서 태어나서 승훈랑을 역임한 후 청원군 부강 동촌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안정나씨의 시조는 나천서(羅天瑞)로, 1370년(공민왕 19) 이성계(李 成桂)가 요동을 정벌하고 귀환할 때 만오천 여 군사를 수백 석의 양곡을 조달하여 무사히 생환시킨 공으로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졌던 인물이 다. 그 뒤 나천서의 6세손이자 나유선(羅裕善)의 아들인 나사종(羅嗣 宗, 1440-1491)이 이름이 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과 무술이 뛰어났 으며, 특히 궁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충청도관찰사 성준(成俊)의 천거로 발탁되어..
비상리 마을초입에 있는 초계인변시석의 효행비입니다. 변시석(1603-1664)은 초계인으로 비홍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주향이며 호는 백은이다.증조 변충남은 중종대에 직산 구기로 부터 비홍에 이거하여 증 통정대부장예원 판결사가 되었고 조 변경복은 임란 때 55세로 노모를 등에 모시고 피화하여 선조 35년에 정표 정려 되었다.부 변유인은 은덕행의가 아름답고 서계 이득윤선생과 지기역리로 상통하였다.변시석은 어려서 부터 효성이 두터워 여덞형제중에서 효봉이 우뚝하였다. 또한 어버이의 뜻을 고여 스스로를 가려 지치는데 삼가며 동기부치에 은헤를 베풀고 병든이와 어려운 이를 건져주며 신의를 지키고 선근을 심었다.효로서 지평에 증직되고 때에 고을사람들이 여러 번 글을 올려 표정을 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되 뒷날 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밀양인(密陽人) 박은로(朴殷魯)의 딸로 경주인(慶州人) 이종석(李鍾石)의 부인이다.성품이 온순한 가운데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으며 남편을 공경하였고 친척들에게도 다정히 대하므로 원근(遠近) 향리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지만 변함없이 늙으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셔 그 효열(孝烈)이 인근마을에 널리 알려졌다. 이 비석은 효부 밀양박씨의 효열비로 1967년 3월(丁未年 3月)에 형곡5동(刑谷5洞) 주민일동의 이름으로 형동리에 세워졌다.비문은 최동겸(崔東謙)이 짓고 썼다. 비석의 전면에는 밀양박씨효열비(密陽朴氏孝烈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후면에는 밀양박씨의 행적이 적혀있다. 형동1리 들어가는 형동교 못 미쳐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효열비 밑에는 창녕성..
북이면 대길리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의 지역으로 대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성동, 소 롱리, 지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길리라 해서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1953년 행정구역을 1구, 2구로 분할 현재 의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다. 구룡말(소성동) : 새터말 서쪽에 있는 마을. 뒷골 : 큰 작골 뒤에 있는 마을. 새터말 : 대길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 음말 : 작은작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 작은작골 : 큰작골 동쪽에 있는 마을. 큰작골(성동) : 대길 서쪽에 있는 마올. 뒷산에 고려 때 쌓은 성이 있다. 장병호 공로비는 숲거리 조성사업이 마무리 되면서 비석이 서있는 현위치인 대길166번지인 274제곱비터를 대길2리에 거주하는 장병호씨가 대길1리 마을에 기증하여 그 보답으로..
병오년에 세운 인동인 장윤석의 기적비입니다.부연1리 마을표지석과 함께 마을입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인동장공윤석기적비(仁同張公胤錫紀蹟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부연리는 비교적 평지가 많은 지역이다. 음성 소류지, 북당 소류지 등이 있다. 자연마을에는 절골, 바깥절골, 가마기가 있다. 절골은 과거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깥절골은 절골의 바깥쪽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기는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가마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1954년 행정구역을 1구와 2구로 분할 현재의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다. 바깥절골 : 메리치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이 절골의 바깥쪽인데 이곳에 있는 마을을 바깥절골이라 한다. 절골(사곡, 은산, 웃말) : 가마기 동쪽에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