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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선암리 풍천임문효자문,열녀문(北二面 仙岩里 豊川任門孝子門,烈女門) 본문
북이면 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풍청임문가와 관련된 사람들의 효자문과 열녀문입니다.
임헌호의 처 문화유씨와 그의 며느리인 임의재의 아내인 철원최씨의 효부문과 임시대의 처 안동김씨,그리고 임기백의 효자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암리는 풍천임씨들의 집성촌입니다.
임헌호 처 문화 유씨(任憲鎬妻 文化柳氏, 1854~1925)문화 유씨는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 1구 풍천임문(豊川任門)으로 시집 온 조선조 효부이다. 통덕랑(通德郞) 임헌호(任憲鎬)의 아내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어머니 병에 꿩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제단을 마련하였다. 밤낮으로 치성을 올린 지 10일 만에 우연히 암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기어 들어왔다. 유씨는 그 꿩을 잡아 시어머니에게 올려 병을 낫게 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매우 애통해 하며 3년 내내 상복과 소식(小食)으로 일관하였다. 또 시아버지가 병이 들자 수년 간 정성스레 간호했다. 그러나 병이 점점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여 한 달여를 더 살게 하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월 삭망(朔望) 때에는 새벽 일찍 상복으로 갈아 입고 묘를 살피며 곡하고 돌아와 상식을 올렸다.1967년 성균관(成均館)에서 표창하고 같은 해 북이면 선암리 1구 산39의 6번지 쟁이에 정려가 세워졌다. 이 정려는 며느리 철원최씨의 효행도 함께 기리고 있다. 며느리 철원 최씨(1881~1974)는 임의재(任義在)의 아내로, 효행이 뛰어나 같은 해에 문교부장관상을 표창하였다.
임시대 처 안동 김씨(任時大 妻 安東金氏, 1756~1816)증숙부인(贈淑夫人) 안동 김씨는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 1구 풍천임문(豊川任門)으로 시집 온 조선조 효부이다.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 임시대(任時大)의 아내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집와서도 시부모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시아버지가 노망(老妄)이 들어 밤낮과
때를 모르고 무단히 집을 나가 산과 들을 헤매었다. 김씨는 애타게 찾아 정성껏 업어서 모셔왔다. 추위에 떠는 시아버지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따듯하게 녹여 드리고, 목이 메어 식사를 못하게 되니 젖을 짜서 들게 하였다. 또 정월에 앵두가 먹고 싶다 하자 후원에 있는 앵두나무를 잡고 애통하게 우니 홀연히 몇 개의 앵두가 달렸다. 이를 따다 봉양하니 모두가 김씨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며 경탄하였다. 1887년(고종 24) 북이면 선암리 1구 산 39번지에 정려가 세워졌다.
임기백은 조선시대 효자. 본관 풍천. 자 공성(公成), 호 영은(靈隱).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출신. 일찍이 7세 때 소학을 배우고 효 사상을 깨우친 이래, 일생 동안 뛰어난 효행으로 만인의 사표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험한 산 속에서 약초를 캐고 깊은 물에서 고기를 낚아 병약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러나 공의 나이 15세 때 부친은 이미 병이 깊었다.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고 성심으로 간병했으나 아버지의 병은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공은 몇 차례나 손가락을 베어 수혈하니 부친은 마침내 회생하였다. 그 후에도 아버지를 지성으로 봉양한 결과 부친은 천수를 다하였다. 23세 때 부상(父喪)을 당하였다. 산소 아래 초막을 짓고 3년간 거의 식음을 전폐하면서 못 다한 효를 다하다가 끝내 몸이 쇠잔하여 25세에 순효(殉孝)하였다.1887년(고종 24) 북이면 선암리 1구 산39-6번지에 정려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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