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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551)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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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재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안가마골에 있는 무송윤씨의 재실입니다. 원남면 하노리에 무송윤씨(茂松尹氏)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3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송윤씨의 시조인 윤양비(尹良庇)의 14대손 윤청(尹暒)이 현종(顯宗) 때 경상북도 상주에서 살다가 원남면 하노리 능촌에 세거한 것이 처음이다. 희암재(希庵齋)는 1965년에 세운 것으로, 희암(希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윤진(尹瑱)[1541~1612]의 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벽체는 시멘트벽돌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동기와를 올렸다. 재실 주변은 담장을 둘렀는데, 솟을삼문에 ‘희암재(希庵齋)’라는 현판을 달았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재실은 예전에 방문했을때와 달리 ..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다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다.햇살이 창문을 통해 길게 거실에서 놀고 있다.아내와 아이는 출근하고 강아지만 반겨주는 늦은 아침이다.오랫만에 길을 나서불까?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음성 설성공원을 찾았다. 한 겨울의 설성공원은 바람이 차다.그래도 그 바람사이로 햇살이 친구하니 견딜만 하다.한 여름 연꽃을 피워 올리며 풍성함이 한창이던 연꽃들도 겨울의 품속에 모두 잠들어 있고그 위로 추위가 지나니 조금은 을씨년 스러운 풍경이다. 경호정은 언제나 그자리에서 나를 반기고앞으로 서있는 독립기념비와 삼층석탑은 언제나 의젓한 모습이다. 설성공원 한 켠 비켜선곳에 있는음성 모전석탑도 언제나 의젓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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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후미리고향 다년오던길에 후미리에 들려 석탑과 한참이고 눈맞추고 왔습니다.언제나 제 자리에서 든든히 절터를 지켜주는 후미리 석탑의 모습이 든든합니다. 음성 후미리 석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음성 후미리 석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음성 후미리 석탑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있다. 2001년 12월 7일 음성군의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탑으로 본래 5층탑이었으나, 현재는 기단부(基壇部)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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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초등학교 뒷쪽 보룡리사지에 위치하고 있는 석불입니다.금박대신 노오란 페인트를 칠해 놓았습니다.보호각의 한쪽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그 덕분에 석불의 뒷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볼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 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원남초등학교 뒷길로 하여 좁은길로 재촉하여 걷다보면 만날수 있는 석불좌상입니다. 차량통행등은 조금 불편합니다.석불좌상을 모신 보호각도 이제는 세월을 입고 많이 쇠락되었습니다. 찾는king61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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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비선거리에 있는 조선 숙종때 충주목사인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목사이후국헌청덕애민선정비( 牧使李侯國憲淸德愛民善政碑 )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비석은 일체형으로 비두에는 구름무늬의 모양이 있습니다.음성 디지털문화대전에는 이채청의 비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정정을 하고자 여기저기 연락해 보아도 비지정이다 또는 비석의 위치가 다르다며 영 정정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이국헌의 비석옆에는 이국헌 다음으로 충주목사가 된 엄찬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이국헌의 아들이 엄찬의 곤장을 맞고 죽었으니 두 비석의 주인공들은 서로 원수일텐데 비석은 나란히 서있습니다.그 사연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비석은 말이 없습니다. 이국헌의 비석은 충주를 비롯하여 현재의 지명인 음성과 괴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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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면 비산리 동네에서 미타사쪽으로 길을 재촉하다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두기의 비석을 볼수 있습니다.동시대에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과 이국헌의 비석입니다.예전에는 이 길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마굿간도 있었고 사람이 쉬어갈수 있는 주막도 있었다고 합니다.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니 고을수령등의 선정비도 있었을 거구요 이 비석이 서있는 거리다 하여 지명마저도 비선거리 입니다.비석은 크기에 비해 조금은 조각솜씨가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비산리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옆에는 동 시대의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비석입니다.두 비석의 모습으로 보아 동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비두에는 태극문양등으로 모습을 내었지만 비석의 크기에 비해 글씨등은 조금은 서툰솜씨 입니다.이 비석들로 인하여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