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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면 비산리 엄찬선정비(蘇伊面 碑山里 嚴纘善政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소이면 비산리 엄찬선정비(蘇伊面 碑山里 嚴纘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0. 16. 06:45

소이면 비산리 동네에서 미타사쪽으로 길을 재촉하다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두기의 비석을 볼수 있습니다.

동시대에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과 이국헌의 비석입니다.

예전에는 이 길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마굿간도 있었고 사람이 쉬어갈수 있는 주막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니 고을수령등의 선정비도 있었을 거구요 이 비석이 서있는 거리다 하여 지명마저도 비선거리 입니다.비석은 크기에 비해 조금은 조각솜씨가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비산리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옆에는 동 시대의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비석입니다.

두 비석의 모습으로 보아 동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비두에는 태극문양등으로 모습을 내었지만 비석의 크기에 비해 글씨등은 조금은 서툰솜씨 입니다.

이 비석들로 인하여 이 곳의 지명이 비선거리라고도 합니다. 옛 영화는 간곳 없고 찾는 이 없는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엄찬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5월 18일 신유 5번째기사 1693년 청 강희(康熙) 32년
충주의 죄수를 경옥에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다.

조강(朝講) 때 충주(忠州)의 죄수를 경옥(京獄)에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충주 아전들의 습속이 매우 사나워서, 목사(牧使) 윤가적(尹嘉績)과 이국헌(李國憲)이 모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그 의심스러운 자 여섯 사람을 가두었는데, 그 뒤에 목사 엄찬(嚴纘)이 또 꾸짖어 욕보인 변고를 당하여, 그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고, 이로 인하여 체임되어 돌아왔었다. 이현일(李玄逸)이 경연(經筵)에서 엄찬의 치적(治績)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유임(留任)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목내선(睦來善)의 말로 인해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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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월 18일 경자 1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청주 목사 엄찬을 국휼 때에 근신하지 않았다 하여 사판에서 삭제하게 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하기를,"청주 목사(淸州牧使) 엄찬(嚴纘)은 바야흐로 국휼(國恤) 초(初)를 당하였는데도 편안하게 관아의 객사(客舍)에서 잠을 자고, 망곡(望哭)할 때에 많이 빠졌으며, 그 고을 안에는 도살(屠殺)을 전처럼 낭자하게 하고, 도내(道內)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본주(本州)에 이르러서 빽빽하게 많이 모여 술과 음악을 함께 벌이고 있으니, 청컨대, 사판(仕板)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1리에 있는, 조선시대에 충주목사를 역임한 엄찬의 선정비입니.  목사 엄찬 진휼비(牧使 嚴讚 賑恤碑)는 총 높이가 168㎝이고, 비신은 높이 110㎝, 앞면 67㎝, 측면 34㎝이며, 개석(蓋石)은 높이 59㎝, 앞면 76㎝, 측면 40㎝이다. 방부(方趺)는 높이 9㎝, 앞면 75㎝, 측면 40㎝이다.  비석 앞면에는 ‘목사엄후찬진휼혜선비(牧使嚴侯讚賑恤惠善碑)’라고 쓰여 있다. 목사 엄찬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비석 내용에 ‘진휼혜선(賑恤惠善)’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충주목사 재임 기간 중 흉년을 당하자 가난한 백성을 위한 선행을 많이 베푼 것으로 보인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주목사 엄찬의 선정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