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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군북면 대정리에 위치한 열부 남양홍씨의 비석입니다.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비석에는 열부남양홍씨지비( 烈婦南陽洪氏之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부인의 열행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열부홍씨 부인은 남양인 여대의 따님으로 단기4214년 8월6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에게 순종하고 형제간 우애로 칭송이 높았다. 16세에 대정리에 사는 조선초 정승을 지낸 충경공의 후손이며 옥천군수 수장의 6대손 희철의 8대손인 인문의 부인이 되었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부군에 공경하더니 20세에 1녀를 낳고 부군이 병들자 백약으로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하직하고 말았다. 부인은 즉시 순절하려 하였으나 후사를 생각하여 부군의 장례를 치루고 조카 내열을 양자로 맞아 후사를 정하였다. 조상들의 도..
대촌大村과 와정瓦亭에서 한 자씩 따서 대정리라 하였다. 대촌리와 와정리가 있고, 자연마을은 대촌, 방아실, 세거리, 와정, 자가터, 거먹골이 있다. 예부터 마을이 커서 대촌大村이라 불렸다. 문화류씨 충경공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재실이 있다. 1506년 참봉 류은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 임진왜란 때 류흥수가 조헌 의병에 참전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여 종용사에 배향되었다. 그때 그의 손자 류복은 궁내사복으로 왕을 호종했다.행정리는 대촌리이며, 자연마을은 대촌, 방아실 등이 있다. 석회석이 포함된 토질이다.주작목은 벼농사이고, 특산물로는 육질 좋은 마늘과 하우스 포도이다. - 방아실: 대촌리 동편 대청호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지형이 디딜방아를 닮아 유래했다.- 방화정: 대촌에서 방아실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정자..
김효영(1923-2006)은 1923년 강원도 삼척군에서 태어났다. 춘천고등학교와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관료로 근무하였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대한석탄공사 총재를 역임하였다.9,10,12,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비석의 전면에는 충청북도지사김공효영선정비(忠淸北道知事金公孝榮善政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은 군북면 대정리 마을초입에 있으며 상태는 양호합니다.대촌리주민일동 이름으로 세워졌습니다. 김횽여의 재직기간으로 보아 비석은 1966-68년 사이에 세워진것 같습니다.비석의 좌측하단에는 그 당시 옥천군수였던 한상욱(1966-68년)과 군북면장이었던 이득우의 이름도 같이 있습니다. 군서면 오동리 한상욱선정비(郡西面 梧桐..
현도면 죽전리에 있는 대한제국시절 문의군수를 지낸(문의군수(1902~1906) 서병익의 선정비입니다. 서병익의 선정비는 문의면 두모리에 1기,부강면 면사무소내에 1기, 가덕면 인차리에 1기등 곳곳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유흥룡은 조선 중기의 학자입니다.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운(致雲)이며, 호는 숙옹(塾翁)이다. 아버지는 유지정(柳之程)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이로(利老)의 딸이다.평생을 고향인 문산(文山: 현 충청북도 문의[文義])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과 같은 난국에 처하였을 때, 국가를 보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그의 시문에는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과 내면적인 자기 성찰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대부 의식 자체를 비판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고 유가적(儒家的)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지켰다. ..
현도면 죽암2리 빗기내(橫川) 마을입구에 있는 돌탑입니다.이 곳에서 도로를 따라 약 2키로 정도 들어가면 횡천이라 불리우는 죽암2리 빗기내 마을입니다. 돌탑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이나 질병, 살(煞), 호환(虎患), 화기(火氣) 등을 막기 위해 쌓은 신앙 대상물입니다. 하지만 마을 앞의 허한 방위를 막기 위해서나 특정한 모양의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단순 비보물(裨補物)이기도 합니다. 다른 신앙 대상물에 비해 풍수적인 비보(裨補)신앙의 모습을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갯마루나 사찰입구에 지나가는 길손이 마구잡이로 던져 놓은 잡석의 서낭당이나 개인이 신을 향한 구도의 마음으로 쌓은 돌탑과는 구별됩니다. 주민들의 소망과 정성이 모아진 비교적 정교한 마을신앙 대상물이기 때문입니다. 돌탑을 시멘..
문의면 두모리 하면 저는 처음으로 연상되는 것이 마을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입니다.두모리 중에서도 두모실로 향하는 길은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논들이 참 보기가 좋습니다. 길 끝에서 만나는 커다란 오래된 두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청주시 지정 보호수입니다.청주 제75호(1982년 지정)입니다. 지정 당시 느티남무의 수령은 약 630년입니다.높이는 25미터이며 둘레는 약 7.5미터입니다. 수세는 왕성합니다. 보호수 앞으로는 수종이 버드나무인 나무도 한그루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밑으로는 두모실 마을 자랑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모실은 임진왜란시 청나라 지사 두사충이 청나라 장군 이여송을 따라 본 지역을 지나다가 구룡산 자락의 고창산 앞에 펼쳐진 터를 보고 부자터라고 좋아 춤을 추었다고 해..
두모리 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서로 바라보는 버드나무가 오래된 마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나무는 수세가 좋으며 동네주민들의 쉼터와 더불어 마을버스의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괴수정 밑에 자리하고 있는 두모실 자랑비 입니다. 오석에 동민들의 마음을 담아 세웠습니다두모실 마을의 자랑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모실 자랑" 천하명산 구룡산 자락에 아늑히 자리잡고 고창산 품에 안겨 부자마을 될터라고 두사충이 손벽치며 춤추었다는 우리 마을에 하늘에 태양은 복을 내리웁고 밤하늘 저 달은 평온을 안겨주었네. 함씨,김씨,임씨,허씨 세거민 되어 서로 화합 시샘하 듯 화목을 자랑하니 이 어찌 우리의 자랑이 아니든가 부락동구 수백년된 괴수정은 조상 대대로 우리를 지켜왔고 평화 번영 안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