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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이차돈순교비(慶州博物館 異次頓殉敎碑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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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이차돈순교비(慶州博物館 異次頓殉敎碑 )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0. 24. 11:01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는 이차돈순교비입니다.

제작년도는 818년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합니다.


이차돈 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스물여섯 살의 하급관리인 이차돈(, 502/506~527)은 몰래 불교를 섬겼다. 고구려는 일찍이 37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몇 차례 승려들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했어도 여기는 난공불락이었다.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527년,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 신라의 이 하급관리는 제 목숨을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신라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불교만큼 더 좋은 새 옷이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내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뜻을 이루리라. 그런 그의 마음을 법흥왕은 가상하게 여겼다. 목을 베인 자리에서 흰 젖이 솟구쳤다. 신라에, 아니 우리나라 불교에, 나아가 이 땅의 정신사에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흰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 하시리다.” ([삼국유사]에서)



불교에 관한 한 신라는 극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곡절은 언제 처음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는지부터 시작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유입을 설명하는 유력한 주장만도 세 가지나 된다. 첫째,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 둘째,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 셋째, 미추왕(262~284) 때라는 [수이전]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주장이 가장 합당한지 따지는 일은 뒤로 미뤄두자. 이렇듯 여러 주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라에게 불교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상대였는지 말해 주는 반증이다.

왜 이다지 여러 가지 설이 나왔을까? 그것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가 그만큼 여러 가지였고,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였음을 말한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의 성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리 잡은 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그들의 문화가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이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게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기독교의 [성서]에 나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말을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해 보면, 삼국의 불교수용이 마치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불교가 삼국에 들어오기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였으며, 백제가 다음을 잇고, 신라는 가장 나중이다. 그런데 불교로 한 사회의 꽃을 피우기는 신라에서였다. 신라의 불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이차돈은 불교를 위해 순교한 사람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불교에 없는 순교의 전통을 신라에 만들어 준 이가 이차돈이었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염촉은 한자식 이름인데, 염()을 신라 말로 이차()라 하고, 촉()은 돈()이라 하여, 우리가 흔히 이차돈으로 부르는 그이이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찬 종()은 곧 습보갈문왕   ()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나온 ‘아도본비’에는, 이차돈의 그 때 나이가 스물여섯이고, 아버지는 길승(), 할아버지는 공한(),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념()이 지은 ‘결사문’에는 스물두 살로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바가 ‘남몰래 불도를 닦던’ 이차돈이라는 대목이다. 스물여섯 살의 아직 젊은 관료인 이차돈이 사실은 불교신자였다는 것인데, 이렇듯 남몰래 불교 신자가 된 사람이 이 시기에 이미 꽤 있었다. 제아무리 탄압을 한다 해도 아도 이후 점점 신자수가 불어났던 것이다. 신라 사회가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은 기존의 민간신앙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도의 시대가 지나고 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비처왕에서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의 시대가 왔다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염촉은 한자식 이름인데, 염()을 신라 말로 이차()라 하고, 촉()은 돈()이라 하여, 우리가 흔히 이차돈으로 부르는 그이이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찬 종()은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나온 ‘아도본비’에는, 이차돈의 그 때 나이가 스물여섯이고, 아버지는 길승(), 할아버지는 공한(),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념()이 지은 ‘결사문’에는 스물두 살로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바가 ‘남몰래 불도를 닦던’ 이차돈이라는 대목이다. 스물여섯 살의 아직 젊은 관료인 이차돈이 사실은 불교신자였다는 것인데, 이렇듯 남몰래 불교 신자가 된 사람이 이 시기에 이미 꽤 있었다. 제아무리 탄압을 한다 해도 아도 이후 점점 신자수가 불어났던 것이다. 신라 사회가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은 기존의 민간신앙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라 초기부터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제사가 성행했고, 지증왕 때에는 아예 신국()을 선포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곧 기존 집권 세력의 자기보호 행동이기도 했다. 여기에 새롭게 들어오는 불교는 민간신앙과 그 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기존 세력의 경계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관료 이차돈은 바로 이런 새로운 세력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기존 세력이 새로운 불교세력을 경계하는 가장 큰 까닭은 왕이 그들을 비호한다는 데 있었다. 법흥왕 이후 왕실은 보다 강력한 통치체제를 만들어 기존의 귀족세력보다 큰 힘을 행사하려 했다. 불교라는 종교는 새로운 이념을 제공해 주기에 족했다. 그들은 왕족을 부처님의 일족으로 격상시키며 신성한 권력을 만들어 나가려 했다. 특히 법흥왕은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를 공식종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왕은 부처의 신성성을 얻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권위로 신하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법흥왕의 불교 공인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문제는 기존의 세력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젊은 세력은 아직 그들을 대항할만한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비처왕 때에 궁중에서 향 피우는 일을 맡은 승려가 궁주와 내통하다 적발되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삼국유사] ‘사금갑()’ 조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실은 힘을 기르지 못한 새로운 세력이 기존의 세력에게 제압당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법흥왕의 때에 이르자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 이차돈 같은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젊은 신하가 나왔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렬했다. 이차돈의 불심은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는 법흥왕의 의도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 하시리다.” ([삼국유사]에서)

그리하여 부처의 날과 임금의 평안을 위해 두 사람 사이에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이차돈은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라’고 왕에게 말했다. 왕의 명령에 감히 어길 수 없도록 서슬 푸른 모습을 보이고, 그 여세를 몰아 불교 공인에까지 바로 이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함은 무엇일까? 왕이 절을 지으려 하자 일부러 늦추어 그 명령을 전했다는 것인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이러하지만 [삼국사기]는 좀 다르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이자 주장하는 이차돈과 그에 반대하는 다른 신하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는데, 법흥왕이 할 수 없이, 이차돈에게 형벌을 주는 쪽으로 결론 내린다고 적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관료가 대신들과 격론을 벌인다는 설정보다, 기왕 목숨을 던진다면 왕에게 힘을 한껏 실어주는 쪽으로 가겠다 결심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어울린다.

어느 쪽의 기록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왕의 명령을 받고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흰 젖은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 이차돈은 순교의 흰 꽃이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 나타난 이적은 이것 만이 아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경주의 북쪽 산에 떨어져 거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두고두고 사람들이 이 순교의 거룩함을 기렸으니, 기리는 일이 쌓여갈수록 신라의 불교는 꽃피워갔고, 꽃 피는 불교에 따라 신라 또한 큰 나라로 발전해 갔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적은 이차돈의 순교기는 거의 일념의 ‘결사문’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그 마지막 대목에 매우 중요한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이차돈의 순교가 신라불교에서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 순교의 전통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는 순간 먼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춘궁()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는 피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월정()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애끊듯 서러운 이별을 했다. 관을 쳐다보며 우는 소리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이다’라고 했다. ([삼국유사]에서)

개자추는 춘추시대 진 문공( )의 신하, 홍연은 위 의공( )의 신하로 충신의 대명사이다. 특히 유랑길의 문공이 굶주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바쳤다고 한 개자추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차돈은 그런 이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아도의 본마음을 이룬 성자’라고 하였다. 바로 이차돈이 아도의 순교를 이었다는 말이리라. 신라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네이버캐스트]




이차돈공양탑()·이차돈공양당() 또는 백률사석당()이라고도 한다. 527년(신라 법흥왕 14)에 불교를 공인받기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그가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에 건립한 것으로, 조각과 비문()이 결합된 비상()의 일종이다. 원래 경주 백률사()에 있었으나, 1914년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옮겼다. 고적보존회는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

비석은 받침돌과 육각 기둥 모양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106㎝, 각 면의 너비는 29㎝이다. 원래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지 않다. 받침돌은 네모난 석재 윗면을 육각형으로 도드라지게 높이고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육각형의 한 면에는이차돈
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각 면에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7행 25칸의 정간()을 치고 그 안에 한 글자씩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읽기 어려우나 마멸되기 전에 탁본()한 것이 여러 책에 실려 있고,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흥린군신각금생서(》《원화첩()》이 전하여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린 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일 등을 묘사하고 있다.

현존하는 불교 공인에 관한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및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