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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죽전리 장현광,장두환송덕비(報恩邑 竹田里 張顯光,張斗煥頌德碑) 본문
남산 품에 자리잡은 죽전리는 예로부터 마을에 뽕나무가 많고, 사람들이 누에 치고 길쌈에 힘써 잠실이라 불렀다. 일설에는 마을의 지형이 누에 모습이라 하여 잠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흐르는 세월에 뽕나무 자취는 사라지고, 1975년 보은고등 학교가 세워진 이후 아파트와 상권이 들어서면서 정감 어린 마을 모습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현재 죽전리에는 500여 가구, 1,5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약 30%의 주민이 농업에, 20%의 주민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뽕나무밭이 도시로 바뀐 ‘상전벽해’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광암, 죽전(대밭말), 우시장통, 잠실이 있다. 광암은 남산 밑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 빛을 내는 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출처: 『보은군지』, 1994), 이전 명칭이 광암리(廣岩里)인 것으로 볼 때, 빛을 내는 돌이라기보다는 넓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대밭말(竹田)은 죽전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마을 뒤 남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생긴 지명이다. 잠실은 위에서 살펴보았듯 옛날에 이곳의 산과 들에 뽕나무가 많아 사람들이 누에를 치고 길쌈을 많이 한 곳이라 하여 유래하였다는 설과 지형이 누에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우시장통은 남산 동쪽 마을로 보은에서 유일하게 우시장이 서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다리와 보은교 사이의 둑방 아래 마을이다.
경상북도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장열(張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1597년 여러 차례 장현광을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장현광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장현광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장두환(張斗煥)은 1883(고종 20)~1941 │ 근대의 독지가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청백리 여헌 (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보은읍 죽전리에 살았다. 타고난 천성이 인자하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동기간의 우애가 두터웠 다. 또한, 매년 닥치는 춘궁기와 흉년에는 양곡과 현금을 회사하여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1925년 보은읍 죽전리 도로변에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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