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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백곡면 배티성지(栢谷面 배티성지) 본문
찾아간 날이 월요일이다. 성지의 휴일이다.
인적도 없고 날씨는 덥고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나?
두어시간 짜리 순례길을 걸었다. 그래도 숲속이니 햇볕이 비치지 않는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오르막 산길을 오르려니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다.뒤돌아 내려가기도 뭣하고 걸었다.
배티성지는 백곡면 배티로 663-13에 있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유적지로 충청북도기념 물 제150호(2011년 3월 4일)로 지정된 곳이다. 배티성지는 조선시대 박해 기간 동안 교우 촌이 있었으며,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마을이 있었으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선교사 들의 사목활동의 중심지였으며, 복자 9위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으로 한국의 대표적 인 천주교 성지이다.
배티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되며, 1930년 초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인근에 여러 마을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곳에서 비밀 공동체를 이루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37년 5월에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가 성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배티 교우촌을 방 문하여 성사하고 이곳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배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의 공소가 되었다. 이후 19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을 겪으면서도 교우촌은 배티·삼박골· 은골·정삼이골·절골·용진골·동골·지구머리·발래기·퉁점·지장골·원동·굴티·새울·방축골 등 더욱 늘어났다.
1850년 9월에는 성 다블뤼(안 안토니오) 신부는 대목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 지시에 따라 배티 교우촌에 초가집을 매입하여 조선대목구 신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배티는 최초의 신학교 마을이 되었다. 이 초가집은 학교 건물로 사 용되었고, 성당 겸 사제관 겸 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하였다. 다블뤼 신부는 1853년 초까 지 이곳에 기거하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이 초가집에 살면서 신학교를 맡았다.
최 신부는 1854년 3월까지 세 명의 신학생(임 빈첸시오·김 사도요한·이 바울리노)을 양성하여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 다. 이후 배티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최 신부가 배티 교우촌을 자신의 본당 중심지로 삼은 기간은 3년 정도였다. 그렇지만 성당 겸 사제관이었던 초가집에는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들이 오랫동안 거처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1821-1861)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그해 12월에 입국한 최 신부는 선종하는 순간까지 12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최 신부는 일 년에 적어도 7,000리를 걸 어 다니며 사목활동을 했고, 일생 동안 9만리 이상을 걸으며 포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최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던 중에도 배티 마을에 들려 머물며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글 을 잘 알지 못하는 남녀노소 교우들이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저술하였다. 최양 업 신부는 교우들에게 전례 기도와 일상의 기도 생활을 가르치기 위해 한글본 천주성교 1 부 사 회 104 공과를 편찬하였고, 신앙의 가르침을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히도록 하기 위해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을 다블뤼 신부와 함께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4·4조의 조선 후기 대중 가 사의 형식을 빌려 만든 신앙의 노래를 보급하였는데 이를 ‘천주가사’라고 부른다. 2020년 현재까지도 다수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향가」·「선종가」등이 다. 최 신부에 의해 배티는 「천주가사」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이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라는 제목으로 로마 교황청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 로 1925년 79명의 순교자들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교황의 한국 방문 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복음화와 교리의 토착화를 위해 전교에 힘을 다하던 중 1861년 6 월, 40세의 나이에 진천 배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천 배티공소에 매장되었던 그의 유해 는 그 해 11월 초 제천 배론으로 이장되었다. 최양업 신부에 이어 배티 교우촌을 방문한 사제는 메스트르(이 요셉)·페롱(권 스타니슬 라오) 신부였다. 그리고 순교자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는 1858년 10월부터 배티 교우 촌을 자신의 사목 거점으로 삼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1866년 병인박해 때 는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당했고, 진천 지역에서도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람만 34명이다. 이 외에도 배티와 인근에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를 비롯하여 6인 묘와 14인 묘 등 유·무명 순교자 묘소가 산재해 있다. 박해가 끝나고 배티 마을은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다.
그리고 1888년에는 선교사들이 배티·삼박골·용진골·새울·굴티 등 5 곳에 공소를 재설정하고 1893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티 교우촌이 성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1977년 당시 진천본당 장봉훈 신부는 배티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알리기 위해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다. 2020년 현재 배티순교성지 내에는, 기념대성당(최양업 신부 선종 150 주년)·성당(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최양업 신부 박물관·옛성당 겸 신학교를 복원 한 초가·배티산상제대성모상·최양업 신부 동상·무명순교자 6인묘·삼박골 모녀순교자 묘· 무명순교자 14인묘·순교현양비·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순례길에 자리하고 있는 야외 성당입니다.성모마리아상이 야외 성당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배티순교성지에서는 주일·평일(화-토) 오전 10시에 미사를 올리고 있으며,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6시30분 ‘감사의 밤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 짝수 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30분에 라틴어 미사가 봉헌되며, 일요일 오전 11시에는 순례자들 을 위한 미사를 한다. 월요일 오전 7시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에 순례자와 성 지 은인 가족들을 위한 미사가 있다. 순례자는 순례 1-2주일 전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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