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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산(養僧山)․양성산(壤城山) 본문
양승산은 청주에서 남쪽 방향 15㎞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점령기에는 일모산(一牟山)으로, 신라 점령기에는 연산(燕山)으로 불리다가, 화은대사(和隱大師)가 승병을 양성했던 곳이라 하여 양승산(養僧山) 또는 양성산(壤城山)으로도 불리어졌다.
형국이 흡사 문의면사무소를 안고 있는 듯하다.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신라의 야망은 컸고 계획은 주도면밀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오래지 않아 천하를 건 대회전(大會戰)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당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미리 계획했던 일이었으나, 그것만 으로는 무엇인가 미흡함을 느꼈다. 가장 효과적인 전략 중의 하나는 적의 배후에 군대를 숨겨 두었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뒤로부터의 급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많은 군대를 배후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군사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현지에 숨겨 둔다는 계책을 마련하였다.
이 무렵, 낭자곡(娘子谷)에서 남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형각강(刑角江) 나루를 건너 사방의 산세를 살피는 스님 하나가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고구려의 땅이었기 때문에 나루터의 검열이 심하였으나 스님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통과할 수 있었다. 경주를 떠날 때 김유신이 신신당부하던 말을 새삼 생각하고 등에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화은대사! 이번 일은 대사의 책무가 특히 막중하오. 고구려 땅에 들어가 국경 가까운 곳에 부처님의 도량을 세울 만한 적지(適地)를 찾아야 하오. 대사께서 터를 정하시면 이곳에서 승려의 행색을 한 군사들을 삼삼오오 보내드리겠소.” “장군! 살생과 살생을 위한 준비는 불가의 제일 가는 금기입니다. 그러나 어서 빨리 삼국이 통일되어 이 땅에서 전쟁이 없어지는 것만이 더 큰 살생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 믿기에 소승이 이 일을 맡은 것입니다. 신라 천지에는 한 목숨 기꺼이 바쳐 평화스런 부처님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는 승려들이 허다합니다. 기왕이면 그들을 보내주어 불법의 수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도록 하시면 고맙겠습니다.”
화은스님은 화랑출신의 승려였다. 불법의 경지로나 무술의 경지로나 범인이 따를 수 없는 비범한 스님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현실적인 살생 사이에서 오는 번민을 느끼며 산길을 걷던 스님은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서쪽에 건너다 보이는 산의 형태가 너무도 기묘했기 때문이다.

‘저것은 중이 발(鉢)을 들고 시주를 구하는 형세가 아닌가? 아깝구나! 부처님의 도량을 세우더라도 600년은 족히 유지될 터인데, 아무튼 은밀히 숨은 산세와 깊은 골짜기가 양병지(養兵地)로서 흠잡을 데가 없구나!’ 화은대사는 그 자리를 양병지로 선정하고, 이 사실을 김유신에게 전했다.이 때부터 승병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모두 합해야 3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지만 모두들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적의 배후에서 양병의 책무를 띠고 활동하는 승려가 화은대사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국경 요소마다 신라의 비밀 군사들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화은대사의 생각대로 그 곳은 절터로서도 그리고 양병지로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모여든 300여 승려들을 제자로 삼아 불경과 무예를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숲속에서 삼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소리를 질러도 밖에서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고요한 산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물’이었다. 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구하려면 까마득한 계곡 아래쪽까지 내려가야 했다. 시간도 많이 걸렸고 계곡 아래는 부락과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에게 발각될 염려도 있었다. 산 중턱의 여러 곳을 파보았으나 물은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화은대사는 고심 끝에 제를 올렸다.삼국의 통일을 하늘도 바라는 일이었을까? 이레 째 되던 날 밤, 수성(水星)이 길게 꼬리를 끌며 땅으로 떨어지더니 어디서부턴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鉢)에다 물을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화은대사는 문득 이 산의 형세가 ‘중이 발(鉢)을 들고 시주를 구하는 형국’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제자들을 시켜 발(鉢)에 해당되는 지점을 파도록 하였다. 과연 엄청난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또한 무예단련에 쓸 죽창용 대나무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알아보던 중 산 뒤편 바위틈에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대나무가 어찌나 강하고 단단한지 그것으로 바위를 찌르면 쇳소리가 날 정도였다.
정신적인 무장과 의지가 철벽같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았던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당나라와의 연합군이 무
력의 대종을 이루었지만 화은대사 같은 유격대원들의 역할 또한 컸음이 사실이다.
통일이 된 후 사실을 알아차린 국경마을 사람들은 신라의 승려들이 숨어서 힘을 기르던 그 산을 ‘양승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은대사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대지(大池)’라 하여 가물 때 이 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효험을 보
았다. 또한 바위틈의 대나무를 베어내어 죽창을 만들던 곳을 ‘대바위’라 불러 오늘날의 ‘죽암리(竹岩里)’가 되었다.
- 청원군 문의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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