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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문덕리월리사사적비(文義面 文德里月裏寺事蹟碑) 본문
월리(月裏)란 이름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고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1657년(효종 8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절의 기록을 보고 절의 중창하려 돈과 재물 그리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또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차례로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信玄) 등은 그림을 그렸다. 붉은 난간 푸른 기와 등의 화려함은 벼랑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압도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동쪽 위쪽에 실(室)과 동암전(東菴殿)과 관음전(觀音殿)의 두 전각 등을 증축하고 부속 건물을 더하였다. 또 속인들로 하여금 토전(土田)을 내어 경작케 하여 부처님께 공양의 기반으로 삼게 하였다. 절의 승려 정민(淨敏) 등이 돌을 다듬고 비를 세워 스승의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왔기 때문에 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月裏寺事蹟碑記
有明朝鮮忠淸道文義月裏寺事蹟碑記
荊江之東九龍山之側曰有所謂月裏寺者是寺也 面勢幽墺無他勝特而寺背三峯磅磸戌削始玉立連聳此最可觀也 寺號月裡者疑其以寺高近月稱之而 或傳寺下有月洞寺在其上故名之未知信否也 寺舊是一小菴不知刱在何刦而中經鬱修之 突蕩爲丘墟楓楠檜栢滿目蕭然殆不識其爲蘭若舊址乃於 崇禎後歲丁酉明玄堂元學大師偶柱誌公之錫願瞻疇躇慨然有重恢之志遂募金帛鳩匠石且移山下新興寺材首建佛殿奉以金像僧寮禪室次第以成樓廊 庖湢繚繞曲折繼以覺明信玄西上人爲之繒畫焉朱欄碧瓦爛壓崖谷至戊午又增置東上室 及東菴觀音兩殿合前後所建瓦五房 又勤導珉俗出土田俾供佛享學師之有力於此寺 不其博哉噫釋敎之行於東國尙矣凡域內之創寺 建塔孰非乞士之修綠 而其能苦心不懈獨辦此許 大營繕使前日之荒林廢墟復成一大梵宇者果畿釋子此其功德不可以無傳也 雖然人代之廢奧成毁相尋於無窮則寺之復爲荒林廢墟有不可知而抑後之浮屠倘有能繼學師之志者願此一區琳宮其將大千歲而無消歇矣寺僧▨祐淨敏等伐石竪碑請余記其事遂略敍其槪俾刻緖石面 歲在乙巳冷節文山老守尹東衡記 德村居士吳益基書
월리사사적비기(月裏寺事蹟碑記)
유명조선충청도문의월리사사적비기(有明朝鮮忠淸道文義月裏寺事蹟碑記)
형강(荊江)의 동쪽 구룡산(九龍山)의 곁에 이른바 월리사(月裏寺)란 것이 바로 이 절이다. 땅의 형세는 깊은 골짜기로 다른 특이할 점은 없지만, 절 뒤 세 봉우리의 빽빽한 돌들이 대패로 깍아 놓은 듯, 옥(玉)이 서서 연이어 솟아있는 듯 한데, 이것이 가장 볼만하다.
절 이름이 월리(月裏)인 것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 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으며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중간에 초목으로 무성해졌다가 그것을 중수(重修)하였다. 또 갑자기 구릉지 공터로 피폐해져 단풍나무 녹나무 회나무 잣나무 등으로 눈에 보이는 곳은 텅 비어 허전해져서 거의 모르는 사이에 풀로 뒤덮혀 옛 터처럼 변하였다. 이에 숭정후(崇禎後) 정유(丁酉)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기둥에 대사의 주장자(拄杖子)에 대해 적혀있는 것을 보고, 더 많은 기록을 보기를 원하며 머뭇거렸다. 이에 대사가 불연 듯 뜻을 떨쳐 일으켜 이 절의 중창을 통해 새롭게하려는 뜻을 두어 드디어 돈과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그리고 차례로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얽고 두르고 휘고 꺽고 이어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信玄) 등 서상인(西上人)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붉은 난간 푸른 기와 등의 화려함은 벼랑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압도할 정도였다.
무오(戊午)년에 이르러 다시 동쪽 위쪽에 실(室)과 동암전(東菴殿)과 관음전(觀音殿)의 두 전각 등을 증축하였다. 또 그 앞 뒤로 기와로 이은 다섯 개의 방이 더 세워졌다. 또 세속의 백성들로 하여금 토전(土田)을 내어 경작케 하여 부처님께 공양하며 또 이 절에 큰공이 있는 학사(學師)를 기리는 것 역시 크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는가.
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나라에서 행해진지는 오래되었다. 무릇 구역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우는 것이 걸사(乞士)의 닦은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고심하며 게으르지 않고 홀로 이러한 큰 수리 작업을 행함으로써 전처럼 황폐해져 수풀로 가득찬 폐허를 다시 하나의 대법(大梵)의 집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승려의 공(功)이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덕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사람의 세대가 지나가면서 황폐해지고 후미져 결국 모양이 무너지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의 부흥이 다시 황폐해져 수풀로 변해 폐허가 되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라건대 후대에 부도(浮屠)가 학사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들어지기를 바라며, 이 하나의 작은 구역인 임궁(林宮)이 대천세(大千世)에 달하여도 훼손됨이 없이 영원하기를 바라노라.
절의 승려 ▨우(▨祐) 정민(淨敏) 등이 돌을 다듬고 비를 세워 나에게 스승의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오니 마침내 대략 그 대강을 서술하여 그 단초를 돌 면에 새기게 하노라.
세(歲) 을사(乙巳)년 냉절(冷節)에 문산(文山)의 늙은 지킴이 윤동형(尹東衡)이 찬술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글씨를 쓰다.
월리사(月裡寺) 입구의 왼쪽 언덕에 부도(浮屠)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장방형(長方形)에 가까운 자연석을 가로 170cmx세로 100cm로 다듬고 중앙에 홈을 마련한 비좌(碑座)위에
너비 83cmx 높이 152cmx두께 24cm의 비신(碑身)을세운 다음, 가로 110cmx세로 68cmx높이 52cm의 팔작지붕형 개석(蓋石)을 덮은 조선후기 일반형 석비이다.
월리사를 중건하고 나서 그 사적을 새긴 비석으로 비액(碑額)에는 자경(字徑) 9.5m의 전서(篆書)로 "월리사사적비기(月裡寺事蹟碑記)"이라 쓰여 있으며,
비문(碑文)은 자경(字徑) 5cm의 해서체(楷書體)로 문의현령(文義親令) 윤동형(尹東衡)이 기(記)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서(書)하여 현종(顯宗) 6년(1725) 냉절(冷節, 寒食節)에 세운 것으로 명기(銘記)되어 있다. 배면(背面)에는 시주자(施主者)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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