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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신송리체화당사사적비(南一面 新松里棣華堂祠事蹟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남일면 신송리체화당사사적비(南一面 新松里棣華堂祠事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9. 2. 16:59

 

 

 

 

형제애가 남달랐던 노씨(盧氏) 사형제가 살았던 집인 체화당(棣華堂)의 사적을 적은 비문이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우겸(李宇謙)이 시말(始末)을 기록하고, 사인(士人) 성구(成球)가 글씨를 써서 비석에 새겼다. 청주(淸州) 남가산(南駕山) 아래 살던 계원(繼元), 후원(後元), 종원(從元), 일원(一元) 등 사형제의 미담이 세상에 알려지자 선조(宣祖)가 이를 듣고 유성룡(柳成龍)을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한 후, 이들의 형제애를 기려 친히 체화당(棣華堂)이란 글씨를 써서 편액을 하사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이들 형제의 집터가 불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행적이 묻혀져 버릴까 우려하여 당(堂)을 중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노씨 사형제의 행적과 함께 조선조에서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를 권장했던 실제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

 

 

 

 

 

棣華堂事蹟碑
堂以棣華名 志盧氏兄弟式相好之誼也 盧氏本吾東名族 居于淸之南駕山下 長諱繼元 次諱後元 次諱從元 文科 李諱一元 兄弟四人 同處一室 朝於斯 夕於斯 白首如一日 信天下之至樂也 觀者愛慕聽者敬歎 西崖柳相國 自嶺赴召歷訪四公留數日不忍離 及入待 遂以實白 我宣廟 特嘉之 手書三字俾揭于堂之額 窮閻下屋 星斗昭回 豈特盧氏一門之榮 實爲靑史百世之光 當時風化之盛 於斯可見矣 猗歟美哉 不幸壬辰兵燹之後 遺墟荒涼 殆不可復識者 于今百有餘年 行路 亦皆咨嗟矣 近辛巳歲 其後孫會唐 與肅 厚址 再章 以鏡 協力重建 竭誠敦事 其克家之風 固可謂有自而然 而前後事實 適無槪見於文字 不侫深恐其久而泯沒 謀於盧氏諸君子 鳩財治碣略記始末 聖祖勵世之典 盧氏孝友之行 庶自此復彰 而亦或有補於末路之矜試云爾
崇禎後再己亥 四月 日 淸州牧使 李宇謙 敬識
士人 成

 

체화당사적비(棣華堂事蹟碑)

당(堂)의 이름을 체화(棣華)로써 이름한 것은 노씨(盧氏) 형제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정의(情誼)에 뜻을 두어서이다. 노씨(盧氏)는 본래 우리 동방의 명족(名族)인데 청주(淸州)의 남가산(南駕山) 아래에서 살았다. 큰아들 휘(諱) 계원(繼元), 둘째아들 휘 후원(後元), 셋째아들 휘 종원(從元), 넷째아들 휘 일원(一元) 등 형제 네 사람이 한 방에 함께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기를 백발이 될 때까지 하루같이 하였으니 천하의 지락(至樂) .
을 믿은 것이다. 보고 듣는 자들이 애모(愛慕)하고 경탄(敬歎)하였다.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이 영남(嶺南)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와 네 분 공(公)을 차례로 방문하고 며칠을 머물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입시(入侍)함에 미쳐서 마침내 실상대로 아뢰니 우리 선묘(宣廟)께서 특별히 가상하게 여겨 손수 세 글자를 써서 당(堂)의 편액(扁額)으로 걸게 하였다. 궁벽한 마을의 아랫사람 집에 임금의 밝으신 돌보아 주심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만 노씨(盧氏), 한 가문만의 영광이겠는가. 실로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광영(光榮)이며 당대(當代)에 교화(敎化)가 성대하게 이루어졌음을 여기서 볼 수 있으니, 아아, 아름답도다.
불행히 임진년(선조 25, 1592년)의 병란이 있은 후에 네 분이 살던 옛터가 황폐하고 썰렁해져 자못 다시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백여 년이 흘렀는데 행로(行路) 또한 모두 한탄스럽기만 하다. 근래 들어 신사년(인조 19, 1641년)에 그 후손인 회당(會唐), 여숙(與肅), 후지(厚址), 재장(再章), 이경(以鏡)이 협력하여 중건(重建)하고 정성을 다해 두터이 섬겼으니 그 집안을 다스리는 풍도(風度)가 참으로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후의 사실은 문자로 대강이나마 나타나 있는 것이 없는 형편이다. 불녕(不佞)이 시일이 오래 지나면 그 사실마저 없어져 버릴까 깊이 두려워하여 노씨(盧氏) 가문의 여러 군자들과 상의하여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만들고 시말(始末)을 대략 기술하여, 거룩한 조상이 세상을 권려(勸勵)한 가르침과 노씨의 효우(孝友)의 행실을 이로부터 다시 뚜렷하게 밝히니, 또한 말세에 삼가 본보기로 삼는 데에 혹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숭정(崇禎) 후재(後再) 기해년 4월 일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우겸(李宇謙)이 삼가 기록하다.
사인(士人) 성구(成球) 가 글씨를 쓰다.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체화당사사적비(棣華堂祠事蹟碑)에 대하여

 

체화서원은 조선 숙종 27년(1701)에 송헌(松軒) 노계원(盧繼元, 1529∼1586), 국헌(菊軒) 노후원(盧後元, 1533∼1592), 지평(持平) 매헌(梅軒) 노종원(盧從元, 1535∼1583), 죽헌(竹軒) 노일원(盧一元, 1539∼1611) 등 교하노씨(交河盧氏) 4형제의 위폐를 봉안하고 세운 사원(祠院)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이들 4형제의 남다른 우애를 보고 선조에게 아뢰어

선조가 친히 "체화당(棣華堂)"이란 어필을 써서 그 집에 걸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당호(堂號)가 되었으며 후에 이들의 사당으로 개편되어 "체화당사(棣華堂祠)"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집과 현판이 불에 타 숙종 27년(1701)에 다시 세우고 영조 37년(1761)에 서암(西菴) 노덕원(盧德元, 1549∼1629)을 추향하였는데,

이때부터 원생 17명을 둔 사원이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후 1967년에 남일면 신송리 큰뫼마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과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잇다.

지금의 서원은 1967년에 중건하고 198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는데 사당 안에는 1967년에 권용직이 짓고 이범규가 쓴 "체화당중건기(棣華堂重建記)"를 걸었고 밖에는

"체화당사(棣華堂祠)"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이정겸이 짓고 성영이 쓰고 숙종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사적비각(棣華堂祠事蹟碑閣)이 있다.

1987년에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