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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 殉節碑) 본문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에 있는 신립 장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신립(1546~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명장으로, 1567년(명종 22) 2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도총관 등을 거쳐 온성부사, 함경도북병사, 평안도병마절도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방어의 임무를 띠고 팔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건립경위]
신립의 순국 충의를 길이 전하고자 1981년 신립장군 순절비를 세웠다.
[위치]
충주시 외곽 서북 방향의 충주 탄금대 내 대흥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충주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곳(합수머리)에서 남한강 상류 쪽으로 1㎞쯤 뻗은 해발 200m 가량의 대문산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비의 받침돌은 거북 형태로 만들었고, 앞뒤 길이가 260㎝, 폭 147㎝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빗돌은 높이 197㎝, 너비 79.5㎝이며, 두께는 28.5㎝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개석은 이수형으로 너비 100㎝, 두께 51㎝, 높이 100㎝의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앞뒷면으로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한자로 ‘충장공신립장군순국지비(忠壯公申砬將軍殉國之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 〈〉안에 한자를 써넣어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신립장군 순절비에는 한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신립장군을 도성(都城) 수호의 맹장으로 삼을 것인가 그를 도순변사로 삼아 적의 기세를 새재의 요충에서 막아야 하느냐로 의견이 나뉘었다가 팔도도순변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충주로 내려와서 전황과 우리 아군의 상황을 고려하여 달천강에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고 전세(戰勢)는 불리했지만 혈전사투하다 47세의 나이로 탄금대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함에 따라 민족의 한이 서린 이 자리에 비를 세워 순국충의를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 오른쪽 면에는 글을 지은 박재륜, 글자를 쓴 김성규, 그리고 비를 세운 김태수가 각자되어 있다.
[현황]
충주 탄금대는 삼국시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한 데서 비롯된 지명으로, 최근 이곳에서 탄금대 토성이 발굴, 조사되어 삼국시대 토성으로 확인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는 신립장군이 싸운 전적지로서, 시대별 역사적 성격이 규명되고 있는 충주 지방의 중요한 역사 유적지이다. 또한 그 외 백기당 조웅장군 기적비, 감자꽃노래비, 충혼탑, 팔천고혼 위령탑 등 여러 역사적 조형물과 국궁 연습장 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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