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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면 대전리 이시진 효자각(東良面 大田里 李時振 孝子閣)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동량면 대전리 이시진 효자각(東良面 大田里 李時振 孝子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2. 20. 08:51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조의 효자 이시진의 정려문이다.

이시진(1578∼1633)은 조선시대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기록된 효자로서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이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 10년)에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엄벌에 처하면서, 이와 더불어 효행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을 펴내 이와 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간행되었다. 1431년(세종 13년) 집현전의 부제학이었던 설순 등에게 왕명을 내려 권부(權溥)의 〈효행록(孝行錄)〉에 우리 나라의 옛 사실들을 첨가하여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사례를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서 칭송하도록 하였다. 이 책의 제목인 삼강(三綱)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유교적인 도리로써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보다는 중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기초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각각의 사실에 그림을 붙이고 이를 설명한 영가(詠歌)나 찬(贊)을 달았다. 내용은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강행실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에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외 94명의 열녀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실려 있다. 한편 이 책은 1471년(성종 12년)에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하여 한글로 언해한 것이 있으며 이것은 각 편당 인원을 줄이고 있으며, 조선 전기 한글 연구로 중요한 자료이다.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까지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조선 시재 판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삼강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속적으로 중간되어 도덕서로서 널리 읽혔다.[네이버]

 

 

이시진의 효행이 기록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 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국문언해를 붙였다.

원집 17권과 속부 1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8은 효자, 권9는 충신, 권10∼17은 열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속부는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특히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 소재나 내용이 동국, 즉 우리 나라에 국한되면서 그 권질(卷帙)이 방대하다는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계급과 성별의 차별 없이 천인계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행실이 뛰어난 자는 모두 망라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효자각 내에는 ‘完山李時振之閭 萬曆 戊申春 命旌’이라 편액 돼 있다.

 

충청북도는 충주시 동량면 ‘이시진 효자각’을 문화재자료 제66호로 8일 지정 고시하였다.

1617년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 속편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이시진(1578~1633)은 조선중기 때 효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극진해 임진왜란 중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하며,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해 소생케 하는 단지주혈을  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 13년(1687)에 명정(命旌)된 정여(旌閭)로서 이시진의 효행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남향으로 배치된 정문(旌門)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두른 내부에 정려문(旌閭門) 편액이 걸려 있다. 자연석으로 낮게 쌓은 기단(基壇)에 네모뿔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원형주를 세웠는데 공포(?包)는 만들지 않고 창방으로 결구(結構)된 주간(柱間)에만 4구(具)의 소루(小累)를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장설(長舌)를 받쳐 주고 있다. 가구(架構)는 양측 대량(大樑) 상부에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宗道里)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건물에 모두 단청을 하였다.

 

효자각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완산이씨들의 재실과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이시진의 묘소도 이곳에 안장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