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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김명진영세불망비(遠南面 金明鎭永世不忘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김명진영세불망비(遠南面 金明鎭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8. 12. 13:38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김명진의 불망비이다. 비석을 바라보면서 왼쪽에서 4번째 비석이다. 개석 및 방부 없이 비신만 존재한다.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39㎝, 앞면 54㎝, 측면 22㎝이다.비신 앞면에는 해서로 '수의김공명진영세불망비(繡衣金公明鎭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수의(繡衣)란 암행어사의 별칭이다. 암행어사는 지방의 군현에 밀견(密遣)하여 변복으로 암행하면서 수령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를 탐문하여 사실대로 복명하는 것을 직무로 하는 특명사신으로 임금의 근시(近侍)의 당하조관(堂下朝官) 중에서 임시사신으로 특명하였음. 

 

암행어사 김명진에 대한 비석이 보은군에 1기 존재하고 있다.

 

 

 

김명진(金明鎭)은 1840년(헌종 6)∼미상.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치성(稚誠)이다.
조부는 김병선(金炳先), 부친은 김석균(金奭均)이며, 김세균(金世均)에게 입양되었다.
1870년(고종 7)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3년에 별겸춘추(別兼春秋)가 되고, 이듬해에는 암행어사
가 되어 충청좌도에 파견되었다.
1879년에 동부승지
를 거쳐 1882년에는 대사성에 올랐다.
그뒤 시관(試官)‧춘천부사를 거쳐 1886년 경기관찰사
, 1888년 경상도관찰사등 외직에만 5년 이상 근무하였다.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고종실록》에는 장계내용이 요약되어 나타나 있는 바, 경기도에 관한 것이 7회, 경상도에 관한 것이 4회나 기록되어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
을 지냈다.

4. 관련 기록
《고종 011 11/10/30(기해) / 충청 좌도 암행 어사 김명진을 접견하다 》

충청 좌도 암행 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 김명진(金明鎭)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 조귀호(趙龜鎬), 전 전의 현감(前全義縣監) 조석희(趙奭熙), 황간 현감(黃澗縣監) 김주진(金周鎭),

연기 현감(燕岐縣監) 이유열(李裕烈), 음성 현감(陰城縣監) 이헌춘(李獻春), 전 현감(前縣監) 윤우현(尹禹鉉), 전 천안 군수(前天安郡守) 김복용(金復容) 등은 죄를 주고 전 청주 목사(前淸州牧使) 홍우경(洪祐慶), 전 청풍 부사(前淸風府使) 김도근(金度根), 전 온양 군수(前溫陽郡守) 이응우(李膺愚), 문의 현령(文義縣令) 조면하(趙冕夏), 제천 현감(堤川縣監) 권재우(權在禹) 등은 평가하여 승급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명진 [金明鎭]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을 받고 지방행정의 잘잘못과 민심 및 백성의 생활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던 임시직책이다.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초에는 행대(行臺) 또는 찰무(察務) 등의 이름으로 지방에 조사관을 파견했으며 세종 대에는 임명과 행동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관리를 파견했다. 중종 대에 들어 비밀리에 어사를 파견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명칭도 암행어사라고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파견에 대한 반대의견도 강해 선조 대까지는 별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왜란과 호란으로 정치의 기강이 흐트러짐에 따라 인조 이후 암행어사의 파견이 빈번히 이루어지면서 상설 제도화되다시피 했다. 특히 18, 19세기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고 민심을 회유할 목적으로 자주 파견되었다.

암행어사에게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증명서인 마패와 형구의 크기 등을 검열할 수 있는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이 지급되었다. 암행어사는 왕의 명령을 직접 집행하므로 관리의 파면 및 직무의 정지,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의 재판, 백성의 고통과 청원의 처리 등 모든 문제를 현지에서 즉결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그 결과를 서면으로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암행어사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당파나 인연이 있는 가문의 관리를 두둔하는 등 문제점을 발생시켰으며, 하급관리들의 부분적인 비행만을 들춰내는 데 그쳐 근본적인 행정개혁이나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암행어사 [暗行御史]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3.30, 가람기획)

 

 

[보은군 산외면 구티리에 있는 암행어사 김명진의 철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