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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구암리 박춘무신도비(南二面 九岩里 朴春茂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남이면 구암리 박춘무신도비(南二面 九岩里 朴春茂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8. 19. 14:20

청주에서의 의병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박춘무이다.

청주의 이곳 저곳에는 박춘무와 그의 아들 박동명 등을 기리기 위한 많은 유적들이 있다

삼대창의사적비와 함께 원모단 그리고 민충사와 박동명 충신각등이 있다.

 

구암리 박춘무의 묘로 들어가기전에 야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박춘무의 신도비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왜적은 거침없는 파죽지세로 밀어닥쳐 보름만에 청산, 황간을 불태우고, 5월 2일에는 보은, 회인, 청주, 진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게 했다. 그래서 청주읍성이 함락된 후 3개월은 우리 관군의 통제권은 상실된 상태였다.

청주성 탈환작전은 7월 하순 시작되었다. 청주의 관군이 무너지기 전 4월에 박춘무는 의병모집 격문(檄文)을 지어 종사(從事) 한혁(韓赫)을 시켜 여러 고장에 보냈다. 문중과 곳곳에서 일어선 의병들이 700여명에 달하자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부모산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7월 4일 청주 복대에서 아들 동명(東命)과 아우 춘번(春蕃)을 앞세워 기병(起兵)했다. 그리고 공주에서 일어난 조헌과 승장(僧將)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에서 만나 8월 1일 의병, 승병, 관군, 3개 연합군 3600여명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조헌과 영규의 의병군은 서문을, 관군은 북문을, 박춘무는 남문을 야음을 틈타 공격하다가 서문을 집중적으로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기상이 악화되어 주춤하는 사이에 왜군은 북문을 향하여 달아났고, 의병군이 무혈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청주성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였으며, 이 낭보는 우리 민족에게는 승전의 희망을, 적군에게는 패전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전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성 탈환 후 공론에 따라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이 되어 좌의대장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다 하여 조헌의 좌의대는 700여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박춘무는 진천에서 적과 싸워 물리치고나자 선조가 계신 의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렵게 선조에게 달려갔다. 그 후 계속 왕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박공은 침술이 뛰어나 선조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병고를 치유했다.

그러다가 선조가 환도하자 박춘무는 환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그간에 여러 고을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의 사심 없는 충성심이 돋보인다. 그가 별세하자 왕은 우참찬(右參贊)을 증직하고 민양(愍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한국위키백과]

 

 

 

 

 

남이면 구암리에는 박춘무의 묘가 있다

작은 입간판이 박춘무의 묘를 찾게 하는 계기가 되였다.

차 한대 통행할수 있는 작은 농로를 따라 가다보면 멀리 비석이 눈에 띈다

답사길을 다니다 보면 나도 몰래 눈이 가는 곳이 있다. 거의 마음속에 감이 맞는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하는 생각이 든다.

 

민양공 박춘무의 신도비이다.

 

[비하동에 있는 박춘무와 그의 아들 박동명 손자인 박홍원의 삼대창의 사적비이다]

 

 

 

[청주시 중앙공원안에 자리하고 있는 박춘무 전장기적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