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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면 앵천리 이충환송덕비(佛頂面 鶯川里 李忠煥頌德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불정면 앵천리 이충환송덕비(佛頂面 鶯川里 李忠煥頌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5. 20. 10:14

 

이충환송덕비가 자리하고 있는동네의 이름은 사근내라고 한다.

사근내라는 지명은 마을앞에 모래가 많이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천이라고도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로 신창이라 하였다.

신창이 속한 리의 이름은 앵천리로 본래 충주군 불정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에 괴산군에 편입(編入)되고 서기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사천리(沙川里), 신창리(新昌里), 앵촌리(鶯村里), 문들리(文等里) 일부(一部)를 병합(倂合)하여 앵촌(鶯村)의 앵자와 사천(沙川)의 천자를 따서 앵천리(鶯川里)라 하였는데 서기 1961년 행정구역 세분화에 따라 건야, 신창, 풍림 3개리가 되었다.


 

 

 

 

이충환송덕비는 1980년에 마을 버스정류장옆에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이충환송덕비(李忠煥頌德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이충환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2,3,5,6,9,10대이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국민일보(충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비의 관리상태는 양호하다.

 

 

 

이충환은 옛 신민당의 1976년 당권파동 때 김영삼 총재가 사퇴하면서 지명함에 따라 총재권한대행을 지냈다.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였다.

이씨는 일본 주오대 법률과를 중퇴하고 1943년 일본 고문행정과에 합격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3년에는 민중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6선을 지냈으며 신민당 시절 김영삼계와 이철승계가 당권을 놓고 대립했을 때는 중도계를 이끌었다.

유족으로는 이규억 아주대 교수와 규필(자영업), 규복(자영업)씨 등 3남3녀와 양재학(자영업), 전해진 체코 대사, 이범래 법무법인 중앙 대표변호사 등 사위가 있다.

 

 

 

 

 

진천출신인 다선의원인 이충환 씨가 증평과 인연이 된 것은 중선거제도로 인해서 괴산·음성· 진천 3개 군에서 2사람이 당선되는 때에 같은 진천 출신 오용운 씨와 나란히 당선되었는데 전혀 생소한 증평에서 의외로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증평지역에 진천에 연고된 사람이 많았고 야당인구가 많았었다는 평도 있었다.
이충환씨 는 워낙 야당의 중진인데다 중앙의 신민당 관계로 지역일을 챙길 여념이 없는데다 증평지역까지 관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행적은 거의 없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광복 전후 충북도청에서 재정과장을 지냈고 충청일보에 근무했으며 자유당 창당 때 입당해 공천 받고 진천에서 당선됐다는 사실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괴산군에서는 오늘날까지 지역 인물 국회의원이 없었던 제10대 국회 4년을 정치 암흑기라고 평했다.

1960년 4.19 혁명당시 이명환 증평초등학교장이 이충환의원의 친형이었다.
남겨진 일화는 수리에 굉장히 밝아서 국정감사 때는 모든 정부부처에서 제일 무서워했다는 말과 기억력이 좋아서 진천지역 유권자는 거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증평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