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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석곡리 연병호 생가(道安面 石谷里 延秉昊生家) 본문
도안면 도안농공단지길로 접어 들면서 우측으로 있는 석곡리에 자리하고 있는 연병호 생가이다.
생가는 동네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생가주위에는 주차시설등은 마련되여 있지 않다.주차등을 하기위해서는 마을회관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연병호 선생의 생가와 뒷쪽으로는 영당인 명덕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흙으로 쌓은 막돌담을 두르고 있으며 초가집으로 꾸며 놓았다. 생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2002,01.11일)로 지정 관리 되고 있다
1894년 충청도 괴산(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출생으로, 호는 원명(圓明)이다. 청안중명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베이징 대학을 졸업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국외로 망명, 만주와 난징,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지린 군정서 분서조직, 서기장 참모 등을 역임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국내로 입국,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된 비밀항일운동단체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국내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1922년까지 복역했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1921년 세계한인동맹(世界韓人同盟會), 1922년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1929년 한국국민당(한국국民黨), 1934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등의 조직에 참여했다.
한편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李甲寧)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1937년 체포되어 1944년까지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환영회 영접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한국독립당 선열사적조사위원장 겸 훈련부장, 대한민국정무위원 겸 농민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에 괴산군에서 당선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대한국민당 후보로 괴산군에서 당선되었다. 1963년 사망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1월 11일에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 소재한 생가가 충청북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연병호[Yeon, Byeong-ho, 延秉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명 연병호(1894∼1963)의 부친인 연채우(延采羽)〈延彩羽〉의 집으로, 독립애국지사 연병호가 태어나고 성장한 생가인 동시에 만년에 이곳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친 집이다.
연병호는 1894년에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하여,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길림성 북로군정서 참모겸 서기로서 국권회복 운동을 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청년외교단<비밀조직> 활동으로 검거 투옥되었다. 이후 다시 망명하여 독립혁명당을 조직하였으며, 1937년 임시정부에서 활약 중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8년 재당선되었다.
현재 정화사업 결과 초가집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 담장과 신축 사당이 인접하여 있다. 당초 집 뒤에 있었던 장독대와 옆에 있었던 옛 화장실을 노인들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경내에 애국지사를 기리는 비(碑)가 들어서 있다. 당초 있었던 연자방아의 유물이 남아 있다. 형식 및 구조는 정면 3칸·측면 3칸의 토벽 초가집으로 남향하였으며 평면형식은 외통형이다. 이 가옥의 특징은 19세기 가장 보편적인 민가의 형식과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초가집으로 되어 있다. 집의 앞·뒤 공간이 당초의 모습대로 남아 있고, 담장과 출입문의 위치도 목격자들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다. 당초의 한옥 모양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농촌의 민가 양식을 볼 수 있다. 원명 연병호생가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 6., 한국관광공사)
선생의 자(字)는 순서(舜瑞), 호(號)는 원명(圓明), 초명(初名)은 병준(秉俊)이며,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동학(東學) 또는 병학(秉學)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이명(異名)을 사용한 것은 자신을 숨기기 위한 계략으로 추정된다. 1894년(고종 31년) 11월 22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서 연채우(延彩羽)의 4형제 중(秉煥, 秉昊, 秉柱, 秉旿)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슬하에는 중희(中熙), 충희(忠熙), 성희(性熙), 혜영(惠英) 등 4남매를 두었으나 장남 중희는 형 병환에게 양자로 입적하였다. 선생께서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 있었던 중명학원(重明學院)을 수료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시 창동학원, 그리고 북경시 중국대학교 등에서 수학(修學)했는데, 아마도 선생께서 중국에서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일찍이 영국에서 유학(遊學)을 하고 1910년대 초 중국 연길시 용정촌(龍井村)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던 형 병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선생께서 출생할 당시(1894년)의 시대상황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게 됨으로써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한 해이다. 이로써 일제는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토지와 인력을 징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定書)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기 위해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었으며, 9월에는 러시아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한국에서 배제시켜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내면서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이완용을 매수하여 2차로 강제협약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늑결(勒結)함으로써 우리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했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지만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으며,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內政)도 완전히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光武保安法)을 공포하고 한국 식민지화에 최대 장애요인이 되었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어서 일제는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일명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통감으로 임명하여 한국 식민지화를 단행하였다. 아울러 헌병경찰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1907년 10월 한국경찰도 일본 경찰에 통합시키면서 1910년 6월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였다. 이어 통감은 1910년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여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을 조인하였으나 조선인들의 저항이 두려워 당분간 발표를 미루다가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동년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8개조로 된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했는데, 이 조약 제1조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에 양여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519년간 이어져 온 조선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것을 일컬어 경술국치(庚戌國恥)라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의분을 참지 못한 유림 5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일제에 의하여 이와 같이 주권을 강탈당하자 선생께서는 25세가 되던 해인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난징, 상하이 등지로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에 있던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와 함께 입국하여 1919년 5월 이병철, 조용주 등과 비밀항일운동 단체인 대한독립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약하였다. 한편 청년외교단 사업의 일환으로 여성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후 다시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여 1921년 4월 한인대동(漢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漢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安昌浩)ㆍ김현구(金鉉九)ㆍ조소앙(趙素昻)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자 않자 조소앙ㆍ김용철(金容喆)ㆍ조완구(趙完九)ㆍ이기용(李起龍) 등과 함께 동회를 탈퇴하였다.
1925년 3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박은식(朴殷植)이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동년 5월 31일 북경(北京)에서 이천민(李天民)ㆍ박숭병(朴崇秉)과 같이 이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安昌浩)ㆍ이동녕(李東寧)ㆍ김구(金九)ㆍ엄항섭(嚴恒燮)ㆍ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여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재 남경(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洪震)ㆍ홍면희(洪冕熹)ㆍ김원식(金元植) 등과 회합하고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 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선생께서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었고,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활동을 하시던 선생께서는 일제 앞잡이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李甲寧)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1937년 1월 7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징역8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아들 성희가 1942년 면회를 갔을 때 선생께서는 ‘아직 못 나가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밖에 가면 왜놈들하고 싸운 곳이 가까운데 있으니 그곳에 가서 어떻게 싸웠는지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형 병환의 부름을 받고 처자식을 남겨둔채 홀연히 중국 망명길에 오른 뒤 슬하에 두었던 4남매를 부인 곽씨가 부양하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찾아가기 위해 3형제를 데리고 시아주버니가 되는 병환을 만나기 셋째 아들 성희가 13세때인 1931년 만주로 찾아갔으나 그때는 이미 상해로 떠난 뒤였다고 하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그렇듯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많은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도 충희는 청진시 청진공업대학 및 길림성에서 중등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였으며, 성희 역시 길림성에서 중등교육 행정공무원 및 상업청(商業廳) 과장으로 재직하였다. 중희·충희 두 사람은1945년 해방과 더불어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으나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는 상황에서 남한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북한의 모처에서 소식이 끊겼는데, 선생의 손자인 연규은(延圭殷)의 진술에 의하면 1965년까지 청진 청남구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83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되었으며, 1945년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문교분과위원으로 광복운동사 편찬과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대책위원 등 많은 활동은 물론 괴산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데 기여를 했고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한 후 서울로 올라가 흑석동에서 월셋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청주 정하를 왕래 하천을 개간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시절 검은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즐겨 신었는데 주변에서 정장을 권유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구두신고 양복을 입으면 나도 입겠다’라고 하면서 일축했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평소 과묵한 성격으로 평생을 처자식 걱정은 하지 않고 오직 나라 걱정만 하면서 살았는데 1963년 1월 26일 눈보라가 치는 날 논두렁길을 급하게 뛰어 집에 당도하니 부인이 병환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나라 걱정만 했다’라고 크게 탄식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운명을 했다고 하며, 부인 곽씨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지켜보고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1) 그후 부인 곽씨는 선생께서 끔찍이 아끼던 지인(知人) 연민희(延敏熙)씨의 보살핌을 받다 6개월 후 사망하였으나 호적에는 선생이 돌아가신 2년뒤인 1965년 3월 15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었다.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손자 연규은(延圭殷)은 작은 할아버지(秉柱)의 딸 연순희(延順熙)씨가 수소문 끝에 중국에서 거처를 확인하고 귀국을 권유하여 1997년 9월 19일 조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회복하고 현재는 증평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으며, 큰딸 연정홍(延正紅)은 중국에 남아 장춘시 길림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의 장례는 1965년 2월 3일 괴산군 사회장으로 도안초등학교에서 영결식을 갖고 도안면 석곡리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1976년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墓域) 167호로 이장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追敍)하d였다[증평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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