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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동 광주안씨효행비(丹月洞 廣州安氏孝行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단월동 광주안씨효행비(丹月洞 廣州安氏孝行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4. 30. 07:14

충주시 단월동 상단마을에 있는 일제강점기 평택임씨 임호현의 처 광주안씨 효행을 기리는 비이다.

단월동 상단마을 입구의 임형업 정려각 옆에 자리 잡은 효행비로, 감정공(監正公) 임성업(林成業)의 8대손 임호현의 처 광주안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단월동 상단마을로 진입하면 얕은 동산 아래로 임형업 정려각이 보이고, 그 옆에 광주안씨 효행비가 자리 잡고 있다.



비좌개석의 형태로 지붕돌의 크기는 68.5×44×25㎝이며, 비신은 33×15×94.5㎝, 대석은 65×44㎝로 화강암이다.

비제는 9×9㎝의 크기로 ‘부인광주안씨효행비(夫人廣州安氏孝行碑)’라 음각되었고, 비제 양옆으로 8글자씩 4×4㎝의 크기로 ‘양이삼성원자백행언필화완심근성경(養以三省源自百行言必和婉心根誠敬)이라 새겨져 있다.
상단마을 입구 자락에 광주안씨 효행비가 있는데, 그 앞으로 농수로가 있는데다 관리가 부실하였으나 자금은 잘 정리하였다.



광주안씨의 행장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음기를 통해 지극히 조신하고 공손하며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어 현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주(廣州)는 서울 남부일대와 경기도 중부를 통칭하는 옛 지명으로 13년(백제 온조왕 13)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어졌으며, 371년(근초고왕 25)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553년(성왕 31) 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로 고치고, 983년(성종 2) 광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에 예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는 안무사(按撫使)로 고쳤으며 1018년 목사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광주목으로 경기좌도에 편입되었다. 1505년(연산군 15)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광주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광주군이 되었다. 1979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 독립하는 등 규모는 축소되었다. 2001년 광주군이 광주시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이후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安邦傑)이 광주안씨의 시조이다. 안방걸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鄕吏로 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大將軍의 軍職을 가지고, 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廣州를 생활 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本貫으로 삼아 왔다광주안씨[廣州安氏] (성씨와 본관, 2011. 1. 14.,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