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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월리사사적비(文義面 月裏寺事蹟碑) 본문
월리사의 연혁은 도로에서 사찰입구로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사적비의 내용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665년(현종 6)에 세워진 사적비에는 형강(荊江) 동쪽 구룡산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월리사라 한 것은 절이 높아 달에 가깝기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도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1645년(인조 23) 명현원학(明玄元學)대사에 의해 현위치로 옮겨 법당을 짓고, 금불상과 승방, 선실을 짓는 등의 중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창이후 절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였겠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짐작해볼 따름이다. 대웅전 처마끝의 암막새 기와에 1730년(영조 6)에 해당되는 글씨가 보여 이때 대웅전이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절에 소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1837년(헌종 3)과 1897년(광무 1)에 조성된 탱화가 있었다고 전하니 중창이후 불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1972년에 요사를 신축하였으며, 1997년에 대웅전의 기와를 새로 입히고 단청을 했으며, 1998년에는 삼성각을 완공했다.
월리사에 전해내려오는 설화로는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월리사의 창건주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이지만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구름을 벗삼아 운수행을 하던 의상대사가 이곳 샘봉산 아래 절을 짓고는 보름달의 청정함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월리사라는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 의상대사가 샘봉산에 절을 지은 까닭은 이곳이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이 만나는 중간 문에 해당하는 전국 5대 명당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샘봉산에도 분화구가 있어 천지의 물과 백록담의 물이 서로 통하는 지점이라고 하니 남북이 갈라져 산 반세기만에 샘봉산에서 솟구칠 통일의 기운마저 고대하게 된다. 이곳이 심상치 않은 길지임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으니 지난 1994년 여름 삼성각을 짓기 위해 산을 깎는 과정에서 귀가 달린 구렁이가 출현한 것을 주지 원명스님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함께 목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뱀들과 함께 출현한 이 구렁이는 팔뚝 보다 굵은 몸체에 귀의 흔적이 뚜렷했다는데, 구렁이의 출현으로 공사를 중단하고 이듬해 봄 제를 올린 뒤에야 삼성각 불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천년을 한자리에 나고 죽으며 염불소리, 법문에 귀를 열었던 것일까? 도량을 온몸으로 누볐을 그 구렁이는 육도를 돌아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분명 불도를 이룰 것이다.
유명조선충청도문의월리사사적비기(有明朝鮮忠淸道文義月裏寺事蹟碑記)
형강(荊江)의 동쪽 구룡산(九龍山)의 곁에 이른바 월리사(月裏寺)란 것이 바로 이 절이다. 땅의 형세는 깊은 골짜기로 다른 특이할 점은 없지만, 절 뒤 세 봉우리의 빽빽한 돌들이 대패로 깍아 놓은 듯, 옥(玉)이 서서 연이어 솟아있는 듯 한데, 이것이 가장 볼만하다.
절 이름이 월리(月裏)인 것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 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으며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중간에 초목으로 무성해졌다가 그것을 중수(重修)하였다. 또 갑자기 구릉지 공터로 피폐해져 단풍나무 녹나무 회나무 잣나무 등으로 눈에 보이는 곳은 텅 비어 허전해져서 거의 모르는 사이에 풀로 뒤덮혀 옛 터처럼 변하였다. 이에 숭정후(崇禎後) 정유(丁酉)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기둥에 대사의 주장자(拄杖子)에 대해 적혀있는 것을 보고, 더 많은 기록을 보기를 원하며 머뭇거렸다. 이에 대사가 불연 듯 뜻을 떨쳐 일으켜 이 절의 중창을 통해 새롭게하려는 뜻을 두어 드디어 돈과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그리고 차례로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얽고 두르고 휘고 꺽고 이어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信玄) 등 서상인(西上人)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붉은 난간 푸른 기와 등의 화려함은 벼랑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압도할 정도였다.
무오(戊午)년에 이르러 다시 동쪽 위쪽에 실(室)과 동암전(東菴殿)과 관음전(觀音殿)의 두 전각 등을 증축하였다. 또 그 앞 뒤로 기와로 이은 다섯 개의 방이 더 세워졌다. 또 세속의 백성들로 하여금 토전(土田)을 내어 경작케 하여 부처님께 공양하며 또 이 절에 큰공이 있는 학사(學師)를 기리는 것 역시 크고 좋은 일이 되지 않겠는가.
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나라에서 행해진지는 오래되었다. 무릇 구역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우는 것이 걸사(乞士)의 닦은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고심하며 게으르지 않고 홀로 이러한 큰 수리 작업을 행함으로써 전처럼 황폐해져 수풀로 가득찬 폐허를 다시 하나의 대법(大梵)의 집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승려의 공(功)이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덕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사람의 세대가 지나가면서 황폐해지고 후미져 결국 모양이 무너지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의 부흥이 다시 황폐해져 수풀로 변해 폐허가 되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라건대 후대에 부도(浮屠)가 학사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들어지기를 바라며, 이 하나의 작은 구역인 임궁(林宮)이 대천세(大千世)에 달하여도 훼손됨이 없이 영원하기를 바라노라.
절의 승려 쌍우(﨎祐) 정민(淨敏) 등이 돌을 다듬고 비를 세워 나에게 스승의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오니 마침내 대략 그 대강을 서술하여 그 단초를 돌 면에 새기게 하노라.
세(歲) 을사(乙巳)년 냉절(冷節)에 문산(文山)의 늙은 지킴이 윤동형(尹東衡)이 찬술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글씨를 쓰다.
月裏寺事蹟碑記
有明朝鮮忠淸道文義月裏寺事蹟碑記
荊江之東九龍山之側曰有所謂月裏寺者是寺也 面勢幽墺無他勝特而寺背三峯磅磸戌削始玉立連聳此最可觀也 寺號月裡者疑其以寺高近月稱之而 或傳寺下有月洞寺在其上故名之未知信否也 寺舊是一小菴不知刱在何刦而中經鬱修之 突蕩爲丘墟楓楠檜栢滿目蕭然殆不識其爲蘭若舊址乃於 崇禎後歲丁酉明玄堂元學大師偶柱誌公之錫願瞻疇躇慨然有重恢之志遂募金帛鳩匠石且移山下新興寺材首建佛殿奉以金像僧寮禪室次第以成樓廊 庖湢繚繞曲折繼以覺明信玄西上人爲之繒畫焉朱欄碧瓦爛壓崖谷至戊午又增置東上室 及東菴觀音兩殿合前後所建瓦五房 又勤導珉俗出土田俾供佛享學師之有力於此寺 不其博哉噫釋敎之行於東國尙矣凡域內之創寺 建塔孰非乞士之修綠 而其能苦心不懈獨辦此許 大營繕使前日之荒林廢墟復成一大梵宇者果畿釋子此其功德不可以無傳也 雖然人代之廢奧成毁相尋於無窮則寺之復爲荒林廢墟有不可知而抑後之浮屠倘有能繼學師之志者願此一區琳宮其將大千歲而無消歇矣寺僧﨎祐淨敏等伐石竪碑請余記其事遂略敍其槪俾刻緖石面 歲在乙巳冷節文山老守尹東衡記 德村居士吳益基書
월리사사적비 금석문에 알수없는 글씨로 나오는 부분은 한문은 비슷한 글자(嬳,嫶,﨎)는 있는데 뒤의 글자로 읽는것이 맞지않을까 한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사적비에 글을 쓴 윤동형이 1723년에 문의현감으로 관직을 제수 받았다.그러므로 사적비가 세워진 을사년은 1725년임을 알수가 있다.1725년 음력3월 한식날에 월리사사적비가 세워졌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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