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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문화원 관찰사 서유방선정비(漣川文化院 觀察使 徐有防善政碑) 본문

전국방방곡곡/연천(漣川)

연천문화원 관찰사 서유방선정비(漣川文化院 觀察使 徐有防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18. 07:41




서유방(徐有防)은 1741(영조 17)∼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달성(). 자는 원례(), 호는 봉헌(). 한성부서윤 서종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서명형()이고, 아버지는 수찬 서효수()이다. 어머니는 이언신()의 딸이다. 형이 이조판서 서유린(

)이다.1768년(영조 44)에 진사가 되어 음보로 교관()을 지내다가 177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778년(정조 2)에 대사간의 자리에 있을 때 『속명의록()』을 언해(

)하여 8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서공유방선정비( 觀察使徐公有防善政碑)라고 음각되어있다.



그 뒤 이조참의·승지·대사성·대사간·대사헌 등의 요직을 여러 차례 역임했으며, 1782년에는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다. 1783년에 개성유수로 있을 때, 두문동태학생() 72인 가운데 3인을 개성부숭절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85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88년에 한성부판윤, 1792년에 형조판서, 사역원 및 장악원의 제조(調)를 역임하였다. 1792년에 홍명호()가 금갑도()에 유배될 때 함께 고신(: 관직 임명 사령장)을 삭탈당했으나 곧 사면을 받아 이조판서·병조판서·공조판서 등을 거쳤다.1794년 검교직제학()으로 있다가 제학() 정민시() 등 10인과 함께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부사직()의 자리에 올랐으며, 1795년에 두 번째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그 해 진하사(使)의 부사로서 북경을 다녀왔다. 1797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간성의 인구 동태를 조사하여 『간성유민환접타민이접성책()』을 지어 올렸다.

삼사의 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전관()을 맡아보는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치면서 정조 때 권력의 중추부에 있었다. 서도에 능했는데,

1785년에 쓴 규장각 상량문 등의 글씨가 있다. 시호는 효간()이다.